[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벌거벗을 용기'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생에서, 또 일상에서 여러 페르소나를 갖게 된다. 겨울 옷 하나로 사계절을 보낼 수 없듯, 다양한 가면으로 유연하게 탈바꿈하며 사는 것이 곧 삶에 적응하는 일이다. 김경록(金敬綠·58)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은 특히 퇴직을 앞둔 중장년이 사회적 페르소나를 벗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꽃과 잎을 모두 떨구고 벌거벗은 겨울 나목(裸木)의 단단한 기세처럼, 자신의 민낯을 마주할 용기, 즉 노후의 나력(裸力, 벌거벗을 힘)을 키워나가길 바라는 그다.
경제학자이자 은퇴 연구 전문가로 이름을 알려온 김경록 소장은 최근 중장년을 위한 자기계발서 ‘벌거벗을 용기’를 펴냈다. 재테크나 투자 등 그의 전공 분야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제목이다. 내용 역시 ‘성찰, 관계, 자산, 업(일), 건강’ 순으로, 돈 문제에 한한 이야기가 아닌 보다 폭넓은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김 소장은 스스로 “은퇴에 대한 생각 전부를 담은 책”이라 일컬으며, 은퇴 전후의 중장년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길 바랐다.
“생텍쥐페리는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삶의 의미를 역할과 책임이라 했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서의 역할과 가정에서의 책임이 줄어드니 그러한 삶의 의미도 점점 퇴색되어가죠. 명함, 직위 등 자신이 갖고 있던 비본질적인 것, 즉 사회적 페르소나를 내려놓는 시기가 찾아오는 겁니다. 흔히 은퇴한 사람들에게 ‘물 빼는 데 3년 걸린다’는 말을 해요. 이는 페르소나를 바꾸는 데 3년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쉽지 않고요.”
혹자는 여러 가면을 둔 이들을 기회주의자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소장은 오히려 하나의 페르소나만 갖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내다봤다. 여러 가면을 잘 바꿔 쓰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고, 은퇴 후 삶에 적응하기도 수월하다고.
“어떤 가면도 영원히 쓸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른 가면으로 바꿔 쓰거나 가면 없는 자신으로 살아가야 하죠. 사회적 페르소나의 경우, 너무 오래 써왔기에 쉬이 벗지 못합니다. 은퇴 후에도 지인의 회사 고문으로 명함을 만드는 등 과거의 흔적을 부여잡기도 하죠. 애써 페르소나를 벗었더라도 자신의 민낯에 당황하곤 합니다. 나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후반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성찰이 중요해요. 때문에 ‘성찰’을 책 서두에서 다뤘죠. 또 젊어서는 부모나 직장의 테두리 안에서 통제가 가능했다면, 이제는 나를 제어할 무언가가 없잖아요.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폭주노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성찰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죠.”
점의 인생관으로 그려낸 인생 그림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폭발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이를 이른바 ‘폭주노인’이라 말한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지난날에 대한 후회에 사로잡혀 있거나, 혹은 반대로 찬란했던 한때에 얽매여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좋든 나쁘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지나치게 연결 짓다 보면 결국 노후의 만족감은 떨어지기 마련. 이에 김 소장은 ‘점의 인생관’을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조언했다.
“나이 듦을 선으로 보는 인생관이 있고, 점의 집합으로 보는 인생관이 있습니다. 가령 연필을 떼지 않고 선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죠.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한 번 잘못된 선을 그어버리면 원하는 그림을 얻기 힘들어요. 반면 점을 찍어 그릴 경우, 실수한 점 하나 때문에 그림을 망치지는 않습니다. 찍힌 점들을 어떤 순서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니까요. 내가 찍은 점들의 집합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의미를 깨닫거나, 관점에 따라 다른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죠. 덕분에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할 수 있고, 어떤 선택에 대한 부담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유한 ‘점’은 인생에 있어 과거의 경험과 사건, 관계, 나의 생각 등을 나타낸다.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잘못된 점을 찍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들이 쌓여갈수록 알게 된다. 실수처럼 보였던 점이 때론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해준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오리온자리’, ‘전갈자리’ 등을 찾곤 하죠. 근데 그건 인간이 붙인 이름이지, 각각의 별이 그런 뜻으로 존재했던 건 아니잖아요. 인생에 찍힌 무수한 점들 역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겠죠. 물론 그 점들이 완성하는 최종 그림은 우리가 눈을 감는 그 순간이 돼야 볼 수 있겠지만요. 그러니 과거에 너무 얽매이거나 미래의 일을 두려워 말고, 새로운 제2인생의 점을 과감히 콱콱 찍어나갔으면 해요.”
다시 태어나 진짜 삶을 꽃피우다
물론 과감히 점을 찍어가는 과정에서도 주의할 부분은 있다. 김 소장은 책에서 ‘인생 후반 5대 리스크’로 성인 자녀, 금융 사기, 은퇴 창업, 중대 질병, 황혼 이혼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인생을 축구 경기로 묘사하며, 이러한 리스크가 닥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축구 경기에서 골(goal)이 가장 많이 들어간 시간대는 ‘후반 마지막 15분’이었습니다. 전반에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부족한 실력도 활동량으로 메울 수 있지만, 후반으로 가면 체력이 바닥나고 진짜 실력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반전이 끝나갈 때쯤 나오는 골이 무서운 겁니다. 만회가 어렵기 때문이죠. 인생 후반에서도 앞서 말한 5대 리스크로 예상치 않게 골을 먹기도 합니다. 이 경우엔 거의 회복이 어렵다고 봐야 해요. 결국 수비를 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울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리스크는 현실적으로 경제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일 뿐, 절대적인 시간이 적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에 김 소장은 노후 삶의 목표를 ‘prosper’(번성하다)가 아닌 ‘flourish’(만개하다)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인생 전반에는 대개 ‘prosper’를 목표로 하죠. 돈도 벌고 재산도 늘리며 사회적으로 번성하기 위해 사니까요. 그러나 인생 후반에는 지난날 자신이 뿌려놓은 씨앗을 꽃 피우겠다는 ‘flourish’의 관점을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노후에 연극배우를 꿈꾼다면 그건 물질적으로 번성하기 위함이 아닌, 잠재돼 있는 나의 달란트(재능)를 만개시켜보겠다는 다짐인 셈이죠. 종종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수명이 길어진 덕분에 우리는 마치 두 번 사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요.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가족을 위해 살았던 전반생, 그리고 오롯이 나만을 위해 사는 후반생. 어쩌면 이 후반의 삶이 더 길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니 다시 태어난 인생이라 여기시고 무엇에든 도전하시며 만개한 삶을 꿈꾸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