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인생의 마지막 질문'
인간은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비교한다면 후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앎’에 대한 강박으로 ‘모름’이 주는 자유를 뒤로한 채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정재현(鄭載賢·64)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는 ‘모르고 사는 것’ 못지않게 ‘살고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게 이미 모름을 벗하며 살아왔으니, 더 좋은 내가 되겠노라, 더 열심히 가꾸겠노라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해줄 성찰들을 모아 ‘인생의 마지막 질문’을 펴냈다.
종교철학 분야 교수로 활동한 지 어언 30년. 정재현 교수는 개인의 삶과 전공의 현실적 의미를 되돌아보기 위한 글을 엮어나갔다. 그렇게 삶에서 일어나는 물음들에 대한 통찰을 추려 ‘인생의 마지막 질문’에 담았다. 제목 속 ‘마지막 질문’이 지니는 속뜻이 남다르리라 여겨졌다.
“우리는 살면서 맞는 수많은 물음을 피할 길이 없는데, 이에 즉답하려고 안달하거나 강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러나 그 물음을 모으고 모아 더 큰 물음으로 만들어간다면 이전의 물음들은 작은 물음이 되거나 더 이상 물음이 되지 않죠. 이러한 삶의 오묘한 생리를 나누고자 ‘마지막 질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질적으로 깊이를 아우르는 통찰을 지향한다는 취지로 새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마지막’이라는 말은 시간적 최후가 아니라 ‘대답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을 수 없는 물음’, 즉 ‘삶의 궁극적인 물음’을 가리킵니다.”
몸이 나를 살고, 마음을 다스린다
정 교수는 책에서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아가는 것’이며, 생명(生命)이란 ‘살라는 명령’과도 같다고 했다. 흔히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요즘, 그는 오히려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우리를 더욱 편안하게 한다고 역설했다.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시작한 생명인데, 정작 난자나 정자의 주인도 그것을 소유한다기보다는 빌려주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러니 주도권은 생명 자체에 있는 셈이죠. 즉 생명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거꾸로 나를 이루는 존재이고 사건이라는 겁니다. 너무도 당연한데,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대전제를 슬며시 잊어버리고 어느덧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소외와 억압을 겪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주체성은 필요하다. 그러기에 주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고 자율일 테다. 정 교수는 “그 또한 소중한 가치이지만 우리 삶에서 매우 제한적이다”라고 강조하며 “이를 망각하면 주체는 인간에게 과잉된 자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그러한 관념에 지배당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모순이고 자유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가 갖는 알량한 앎으로 모든 삶의 무게를 재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습니다.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지만요. 그러니 삶이 나를 산다는 깨달음은 자기강박과 자기기만을 벗어나게 하는 해방구입니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방종으로 가자는 건 아녜요. 혹시 내가 삶을 산다면 방종할 수 있겠지만 삶이 나를 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거든요.”
정 교수는 비슷한 맥락으로 “몸이 나를 살고 있다”고도 했다. 최근 인문·철학서를 보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강조하지만, 그는 ‘몸의 소리를 듣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과연 모든 일이 마음먹기 나름이던가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 않나요? 물론 마음도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인 양 여기면 오히려 부담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부담은 고스란히 몸으로 가죠. 마음과 몸은 불가분리인데 마음만 부추기면 그것은 결국 ‘앎’으로 쏠리게 됩니다. 이에 비해 몸은 ‘모르고도’ 사는 삶의 터이며 곧 삶이죠. 나는 몸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살아가잖아요. 바로 몸의 그러한 역할과 의미에 주목해 삶의 생리를 따르자는 겁니다. 마음을 구실로 몸을 혹사해온 것이 문명세계를 사는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건강관리도 결코 부차적인 게 아니죠. 오히려 마음을 다스릴 몸의 선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코로나19, 숨과 쉼 필요해
정 교수는 책을 통해 앎과 모름, 있음과 없음, 지식과 지혜 등 대조적인 두 단어에 대해 깊이 통찰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름의 모름’에 다가가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모른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앎은 모름을 없애는 걸 목표로 하지만, 모름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때문에 모름을 안다는 것은 한 단계를 뛰어넘는 거죠. 그런데 이는 막연합니다. 모름이 무엇인지 얼마나 넓고 큰지 알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한 번 더 뛰어넘어야 합니다.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르는 단계까지 말이죠. 모름의 앎이 그저 ‘앎’이라면, 모름의 모름은 ‘삶’입니다. 무슨 대단한 경지를 뜻하는 게 아니라, 모름으로 에워싸인 삶에 보다 진솔해지자는 겁니다. 늘어나는 앎 속에서도 삶이 더 힘들어진다는 점에 견주어본다면 모름의 모름이 주는 편안함은 소중한 통찰이죠.”
정 교수는 삶을 편안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문제 대신 즐기기’를 제안했다.
“문제를 해결한 뒤 삶을 즐기겠다는 건 일종의 완벽주의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문제 대신 즐기라는 건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문제를 옆에 두고서라도 즐길 방법을 찾으라는 거죠. 살면서 씨름할 문제들은 ‘해결’로 종결되기보다 ‘해소’로 흩어집니다. 앞서 말한 ‘물음’처럼 더 큰 문제를 만나면서 지금의 문제가 작아지고 결국 문제가 아닌 것이 되며 해소되는 셈이죠.”
최근 인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코로나19’가 아닐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무증상감염자는 자신도 모르게 남을 감염시킨다. 이렇듯 없음과 모름이 에워싼 형국에서 한 줌밖에 안 되는 인간의 ‘앎’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정 교수는 이러한 위기 속, 기도를 통한 ‘숨’과 ‘쉼’이 절실하다고 이야기했다.
“백신은 없는데 감염됐을지도 모르는, 없음과 모름이 난무하는 현실에서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놓아야죠. 특정 종교를 떠나 기도는 바로 이렇게 놓는 길에 다가서는 몸짓입니다. 있음과 앎만을 붙잡고 삶을 헤쳐갈 수 없으니 이제 할 일은 없음 앞에서 숨을 고르고 모름 앞에서 쉬는 것입니다. 더불어 자연에게도 쉼을 주어 스스로 숨을 쉬게 해야 할 테니까요. 인간과 자연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숨과 쉼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