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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로 다음 세대에 지혜 잇는 스포츠, 브리지”

입력 2026-02-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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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한국브리지협회 회장, “아이부터 시니어까지 통하는 고령사회에 적합”

▲지난 4일 열린 ‘회원의 날’ 대회 현장에서 만난 김혜영 한국브리지협회 회장.(이준호 기자)
▲지난 4일 열린 ‘회원의 날’ 대회 현장에서 만난 김혜영 한국브리지협회 회장.(이준호 기자)

“배우는 첫날부터 좋았습니다.”

브리지를 처음 배운 날을 김혜영 사단법인 한국브리지협회 회장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카드 게임이지만 운에 기대지 않고, 판단과 기록이 남는 구조, 그리고 결과 앞에서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투명함이 그를 붙잡았다.

김혜영 회장은 ‘국가대표 재벌가 며느리’로 대중에게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7남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부인인 그는,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브리지 종목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며 화제를 모았다. 그는 기업가 집안의 며느리라는 수식보다, 실제 경기장에 나서 성적으로 평가받는 선수이자 현장에서 브리지를 대한체육회 정식 종목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하고, 대중화시킨 실무형 리더라는 점에서 체육계 안팎의 시선을 끌었다.

김 회장은 2010년 브리지를 접한 뒤 2017년부터 협회 부회장을 맡았고, 2024년부터는 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브리지를 “시스템이 완성된 마인드 스포츠”라고 정의했다.

“카드를 그냥 섞지 않습니다. 보드라는 도구에 미리 세팅된 패를 쓰고, 비딩 박스를 통해 의사 표현을 합니다. 경기 결과는 브리지메이트로 바로 집계되고요. 같은 핸드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풀었는지까지 모두 남습니다. 그 기록이 30년 넘게 쌓여 있어요.”

그는 바둑에 ‘기보’가 있듯 브리지에도 모든 판단의 흔적이 남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과보다 과정이 드러나는 스포츠라는 의미다.

“기억력·추론·판단 요구하는 머리 싸움, 시니어에 도움”

협회 회원의 상당수는 60대 후반과 70대 여성이다. 외교관 부인을 위한 교양 교육으로 도입됐고, 백화점 문화센터를 중심으로 교육이 이뤄진 배경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이분들은 일주일에 세 번, 네 번씩 나옵니다. 집에 있으면 처질 수 있는데, 차려입고 대중교통 타고 오면서 사람이 달라져요. 20분마다 다른 상대와 맞서 3시간 이상 집중하는 스포츠니까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생기고, 관계가 이어진다. 김 회장은 “브리지는 사회적 고립을 막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대고,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경쟁하고, 끝나면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말이 금지된 경기 시간과, 그 뒤에 이어지는 짧은 수다의 대비가 오히려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설명이다.

물론 치열한 ‘머리 싸움’ 역시 시니어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패를 기억하고, 확률을 계산하며, 상대와 파트너의 선택을 동시에 고려하는 과정 자체가 일상적으로 뇌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브리지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말을 못 하니까 생각을 해야 하죠. 파트너와는 카드로 대화합니다. 눈빛이나 표정이 아니라 논리로 소통하는 게임이에요. 브리지는 매 판마다 기억력·추론·판단을 동시에 씁니다. 같은 패라도 매번 다르게 생각해야 하죠.”

그는 이런 반복적인 사고 훈련이 고령자에게는 치매 예방과 인지 기능 유지에 긍정적인 자극이 된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해외와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APEC 정상회의가 열리던 시기, 경북도, 경주시와 협력해 국제 브리지 대회를 기획·운영한 바 있다.

“APEC이라고 하면 다들 책상에 앉아 회의만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어울리는 상징적인 스포츠로 브리지가 선택됐어요. 21개 회원국 가운데 19개국 대표팀을 초청해 숙박과 항공을 모두 지원하면서 대회를 개최했죠. 힘들었지만, 참가국들은 ‘이런 교류 방식은 처음’이라며 굉장히 만족해했어요.”

김 회장은 오는 11월 서울 강남에서 국제 성격의 브리지 행사를 개최할 계획도 밝혔다. 국내외 참가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회로, 브리지를 중심으로 문화와 교류 요소를 결합한 행사로 준비 중이다. 그는 “브리지가 가진 지적 이미지와 강남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이 만나면 새로운 장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브리지의 존재감을 알리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밝혔다.

활발한 보급과 조직적인 활동을 바탕으로 브리지는 세계적으로 ‘강국 종목’으로 꼽힌다. 학교 교육과 생활 스포츠로 적극 확산된 중국에 이어, 한국은 아시아에서 2위권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우리보다 도입 시기가 빨랐던 일본은 종목을 이끌 핵심 리더십의 부재 등으로 저변이 빠르게 축소되는 상황이다.

▲브리지 대회에 참가한 회원이 카드를 들고 패를 읽고 있다. 조용한 집중 속에서 판단과 추론이 오가는 경기 특유의 긴장감이 현장에 흐른다.(이준호 기자)
▲브리지 대회에 참가한 회원이 카드를 들고 패를 읽고 있다. 조용한 집중 속에서 판단과 추론이 오가는 경기 특유의 긴장감이 현장에 흐른다.(이준호 기자)

“브리지의 다음 무대는 학교, 100곳 보급할 것”

김 회장은 이 브리지를 단순한 스포츠로 보지 않는다. 브리지가 지닌 장점이 일상 속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가 브리지를 ‘전 세대를 잇는 마인드 스포츠’라고 부르는 이유는 학교 현장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김 회장은 최근 몇 년간 방과 후 수업과 정규 수업을 통해 브리지를 접한 아이들의 변화를 지켜봤다. 그는 브리지가 집중력과 관계 맺기를 동시에 훈련하는 드문 도구라고 말했다. 말로 앞서려는 아이와 조용한 아이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같은 규칙 아래에서 사고로만 경쟁한다.

“일부 학교에서 가르쳐 보니 성적 1등 아이와 문제 학생이 같이 어울립니다. 시간이 지나면 잘하는 아이가 못하는 아이에게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알려줘요. 관계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아이들이 집중력이 떨어진다, 스마트폰에만 빠져 있다 걱정하잖아요. 브리지는 3시간을 앉아서 집중하게 만듭니다. 아이들이 ‘엄마, 나 오늘 3시간 핸드폰 안 봤어’라고 말해요.”

이 경험은 김 회장의 목표를 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학교 100곳’ 보급을 올해의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학교체육진흥회와 방과 후 교육 업체를 통해 브리지를 학교 안으로 들여보내는 구상이다.

김혜영 회장이 그리는 브리지의 미래는 다양한 세대가 교류하는 도구로의 쓰임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우고, 지역 센터에서 시니어가 만나고, 국제 무대에서는 한국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종목. 김 회장은 말이 없는 카드가 메신저가 되어 지혜와 생각을 전하는 종목으로 성장하길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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