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이 울긋불긋 물드는 가을입니다. 여름내 그늘을 만들어줬던 우거진 숲이 붉은색으로, 노란색으로 물드니 별천지가 따로 없습니다. 꽃보다 예쁜 형형색색의 단풍을 보겠다며 길 나서는 행렬에 전국의 도로가 몸살을 앓는 시월입니다. 이런 가을날 온 산에 가득한 단풍일랑 제쳐 놓고, 단풍놀이 차량으로 인한 지독한 교통체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야생화가 있습니다. 바로 물매화입니다.
이른 봄 매화가 그윽한 향으로 온 천지를 뒤덮는다면, 이른 가을에는 물매화가 빨간 립스틱을 앞세운 채 온 세상을 유혹합니다.
‘물가에 피는 매화’란 뜻의 이름대로 흰색의 단아한 꽃은 고매한 정절을 상징하는 매화꽃을 똑 닮았습니다. 다섯 장의 단정한 꽃잎과 중앙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동그란 암술 하나, 연한 미색의 꽃밥이 달린 다섯 개의 수술이 물매화 꽃의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많은 이들을 매혹하는 물매화는 수술의 꽃밥이 선홍색으로 빛나는, 이른바 ‘립스틱 물매화’입니다. 청명한 가을의 파란 하늘을 향해 우윳빛 꽃잎을 활짝 받쳐든 것만으로도 예쁘기 그지없는데, 수술 끝에 붉은색 루주로 화장까지 했으니 가히 환상적입니다.
“오늘 밤만은 그댈 위해서 분홍의 립스틱을 바르겠어요. / 그대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분홍의 입술 자국 새기겠어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내 정녕 그대를 잊어 주리라.”
가요 메들리가 물매화 피는 계곡에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한여름 맑고 차가운 물로 더위를 식혀주던 계곡이 가을이 되니 매화보다 더 예쁜 물매화를 가득 피우고 길손을 반깁니다. 계곡이 깊고 물이 맑을수록 물매화 꽃 역시 더 맑고 그윽한 향을 풍깁니다.
계곡 물은 맑고 푸르고, 물매화 꽃은 희고 단아하고, 물에 비친 하늘은 높고 짙푸르고…. 물가에 핀 물매화. ‘정말 좋은데 표현할 길이 없다’는 광고 문안처럼, 정말 예쁜데 더 이상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전국의 높고 큰 산에 가면 만날 수 있다. 한라산과 지리산에서부터 가야산, 황매산, 대암산, 도솔산, 용문산 등 웬만큼 이름 있는 산에는 다 자라며, 이른 곳은 7월 중순부터 늦게는 10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그중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양대 탐사지는 강원도에 있다. 평창군 대화면의 대덕사 계곡이 그 하나요, 정선군 화암면의 덕산기 계곡이 다른 하나다. 둘 다 자동차로 자생지 바로 옆까지 갈 수 있다. 접근이 수월한 만큼 훼손되기 쉽다.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며 뜻있는 이들이 애 태우며 한사코 숨기고 싶어 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그런데 덕산기 계곡의 물매화를 만나기 전에는 ‘영문도 모른 채 영문과에 갔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물매화가 왜 물매화인지를 몰랐다. 높은 산 정상 어름 물 한 방울 없는 곳에서 피는 물매화만 봐왔기 때문이다. 천안의 성거산은 중부 지역의 야생화 애호가들에게 이름난 물매화 자생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