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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L 칼럼] 겨울에 대하여

기사입력 2015-12-09 08:53

임철순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최근 어느 책을 읽다가 체코의 속담에 마주쳐 한방 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 속담은 “겨울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여름에 무엇을 했느냐고”였습니다. 이렇게 속담의 추궁을 받다 보니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속담이라기보다 하나의 잠언, 격언으로 보이는 말을 음미하면서, 한 해의 마무리와 지난여름의 일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영화가 있었지만, 지난여름에 나는 무슨 일을 했던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모르는데, 남들이 오히려 더 아는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여름은 활동하는 계절, 뜨거운 감정 소비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어느덧 다 보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가을도 배웅하고, 모든 것이 침잠하고 스스로 감추어 웅크리는 차가운 계절을 맞았습니다. 갈수록 가을은 짧아지고, 봄도 오는 듯 바로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이제 여름과 겨울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서 배운 계몽편(啓蒙篇)은 계절의 의미를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봄이 되면 만물이 처음 생겨나고 여름에는 만물이 성장하고 자라나며 가을에는 만물이 성숙하고 겨울에는 만물이 감추어진다. 그런즉 만물이 생겨나서 자라나며 거두어지고 감추어지는 것이 사시의 공이 아닌 것이 없다.”[春則萬物始生 夏則萬物長養 秋則萬物成熟??冬則萬物閉藏? 然則萬物之所以生長收藏 無非四時之功也]

사계절의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장수장(生長收藏)입니다. 이 겨울을 맞아서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닫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저장할까. T S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장시 ‘황무지’에서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Summer surprised us)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지/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마른 뿌리로 작은 생명을 길러주었어’(Winter kept us warm,/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라고 합니다.

겨울은 그러니까 모든 게 죽는 계절이 아니라 되살리기 위해서 따뜻하게 묻어두고 그 생명을 잘 기르기 위해 감추는 시기입니다. 동양의 사유나 철학에서는 자연의 운행질서는 조물주의 신공(神功)이며 우리 인간은 그 질서를 거스르지 말고 잘 순응하고 조화를 지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겨울이 지나지 않고 봄이 오랴?”라는 게 있습니다. 세상일에는 일정한 순서와 법칙이 있는 법입니다.

겨울은 달력으로 입동부터 입춘 전까지, 천문학적으로는 동지부터 춘분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삼동세한(三冬歲寒)을 건강하고 보람 있게 보내야만 그 이듬해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바깥세상이 폐쇄되면 내부의 세계가 넓어진다. 겨울은 내면의 계절이다.” 일찍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또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라는 글에서 “겨울은 ‘나는 것’이 아니라 ‘부딪쳐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절망 속에 희망을 잉태한 거대한 역설의 구근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엇의 시를 연상시키는 문장입니다.

청마 유치환도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글에 “온갖 생물을 시들리고, 움츠려뜨리기 마련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그 서글프고 가혹한 추동(秋冬)이라는 계절이 실상은 온갖 생물의 생명들이 다시 움트고 소생함에는 없지 못할,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나는 겨울을 ‘벗과 책의 계절’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옛 선비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난로회(煖爐會)라는 모임을 즐겼습니다. 벗들을 불러 모아 화로에 솥뚜껑을 올려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난로회 또는 철립위(鐵笠圍)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관서 땅은 시월에 눈이 한 자 넘게 쌓이면/겹겹의 휘장에 푹신한 담요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삿갓 모양 솥뚜껑에 노루고기를 구워/가지 꺾어 냉면에다 파란 배추김치 먹는다네.” 흥겹고 정겨운 술자리의 모습이 약여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에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더디 시드는 걸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는 논어의 말이 씌어 있습니다. 추사는 중국 연경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을 구해 유배지에 가져다준 제자 이상적에게 이런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림에 ‘오래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찍었습니다. 빈궁하고 어려워지면 벗과 우정의 소중함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도연명의 ‘의고(擬古)’라는 시에는 의복이 언제나 남루하고, 한 달에 아홉 끼니를 먹을 만큼 가난하고, 10년을 관(冠) 하나로 지내지만 언제나 얼굴빛이 좋은 동방의 선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을 보려고 새벽에 강나루를 건너가니 거문고를 끌어당겨 나를 위해 연주를 합니다. 도연명의 시는 “바라건대 그대 곁에 머무르면서 지금부터 한겨울을 지냈으면”[願留就君住 從今至歲寒]으로 끝납니다. 맑은 인격의 만남이 참 아름답고 부럽습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독서를 하기 좋은 때인 삼여(三餘)는 농사일이 없는 겨울과 밤, 일을 못 하는 비 오는 날을 말합니다. 농사만을 짓고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지만 오늘날의 생활에 맞게 개념을 확대해 적용하면 책 읽을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책을 읽어야 좋은가. 독서에도 그에 맞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보다 아름다운 수필’을 쓴 사람으로 평가받는 중국 청(淸)초의 무명 문인 장조(張潮·1650~1703?)는 “경서(經書)를 읽는 데는 겨울이 알맞고, 역사서를 읽는 데는 여름이 알맞고, 제자백가서를 읽는 데는 가을이 알맞고, 여러 사람의 문집을 읽는 데는 봄이 알맞다”고 했습니다.

계절별로 다 이유가 있지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와 같은 경서는 방 안에 앉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겨울에 읽어야 좋다는 뜻입니다. 여름에 역사서를 읽는 것은 낮이 길기 때문인데, 지금도 여름 휴가철에 대하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벗과 사귀고 어울리며 속으로는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읽음으로써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1년을 맞는 힘을 갈무리하고 비축하고자 합니다. 2015년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지만, 제야와 송년처럼 가는 것과 보내는 것의 아쉬움만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체코의 속담을 바꾸어 말하면 “여름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겨울에 무엇을 했느냐고”라는 질문과 추궁 앞에 의연하게 마주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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