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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L 칼럼] 남기는 것에 대하여

기사입력 2015-08-07 08:15

이상교 시인의 동시 ‘남긴 밥’을 읽어봅니다. ‘강아지가 먹고 남긴/밥은/참새가 와서/먹고,/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쥐가 와서/먹고,/쥐가 먹고 남긴/밥은/개미가 물고 간다./쏠쏠쏠/물고 간다.’

따뜻하고 좋은 시입니다. 설마 강아지(개가 아닙니다)나 참새나 쥐가 다른 짐승과 곤충을 위해 일부러 밥을 남기기야 했겠습니까? 작고 여린 것들을 보는 시인의 눈이 그렇게 읽는 것이지요.

여기에서의 남김은 배려와 순환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개미가 먹다 남긴 밥을 먹는 생명체가 또 있습니다. 그런 생명체가 죽어 밥이 되면 그 밥은 다시 시에 나오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누군가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콩을 심을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었습니다. 벌레에게 한 알, 새에게 한 알, 우리 인간이 먹을 한 알입니다. 그런다고 벌레나 새가 기특하게 한 구멍에서 한 알씩만 먹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친구는 그런 의미와 생명에 대한 외경을 담아 ‘콩 세 알’, ‘三豆齋(삼두재)’ ‘세알콩깍지’라고 호를 지었습니다. 그의 호는 ‘콩밝(空朴)’으로 진화했습니다. 여기에도 배려의 남김이 있습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어머니는 마당에 뜨거운 물을 뿌릴 때 “눈 감아라, 눈 감아라” 그런답니다. 뜨거운 물이 스며들어 땅속의 벌레들에게 미치면 눈이 멀 수 있으니 눈을 감으라고 벌레들에게 일러준 것입니다. 미물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다 내가 아닌 남, 타자를 위한 남김입니다. 이와 달리 오로지 자신을 위한 남김이 있습니다. 남을 위한 남김이 결과적으로는 내가 남는 일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남김을 지향하며 삽니다.

남긴다는 뜻의 대표적인 한자는 遺(유)입니다. 가랑비, 남기다, 남다, 끼치다, 전하다, 잃다, 버리다, 두다, 떨어뜨리다, 빠뜨리다, 쇠퇴하다, 이런 뜻의 한자입니다. 반대되는 한자로는 遣(견)을 들 수 있습니다. 보내다. 떠나보내다, 파견하다, 떨쳐버리다, 내쫓다, (시집을) 보내다, (아내를) 버리다, 이런 뜻의 한자입니다.

생김새도 비슷한 두 글자가 처음엔 완전히 반대말인 것 같더니 쓰임새가 커질수록 의미가 비슷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남기는 것은 자신을 위해 뭔가를 간직하는 행위인 것 같지만 실은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虎死遺皮 人死遺名(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遺를 留로 쓴 경우도 많지만, 남긴다는 뜻에서는 遺가 더 어울릴 것입니다. 流芳百世 遺臭萬年(유방백세 유취만년), 꽃다운 이름은 백세를 가지만 더러운 악취는 만년 동안 남는다는 말도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줍니다.

인간은 나이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비하려 애쓰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이름으로 남을까, 자식들에게는 뭘 남겨주어야 할까, 이것은 전적으로 즐거운 일만은 아니며 근심이요 걱정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안 주면 맞아 죽고, 덜 주면 볶여 죽고, 다 주면 굶어죽는다는데, 어떻게 하는 게 슬기로운 일일지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노후가 괴롭고 고달픕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새끼를 위해 제 살까지 먹이로 내주는 늙은 거미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뜯어먹기 좋은 게 부모의 등골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는 사람은 하는 일이 헛되다.”[無孩兒浪營爲]고 합니다. 남김을 통한 명예의 보전과 존재증명의 중요성을 역설한 말일 것입니다. “자식에게 남겨주기에는 황금이 가득한 상자가 한 권의 경서만 못하다”고 책과 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김과 사후를 생각할 때 지금은 나의 모든 것이 다 짐이 되는 시대입니다. 많은 추억과 사연이 담긴 사진, 그 많은 인연과 손때가 묻은 책들은 내가 아끼는 소중한 물건이지만 자식들에게는 의미 없는 천덕꾸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걸 다 처분하고 가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한 권의 훌륭한 책으로 엮어 낸 학자를 인터뷰하면서 “어떤 인간으로 남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무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삶의 자취 자체를 무로 돌리고 싶다는 바람이 놀라웠습니다.

장자(莊子)는 제자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려 하자 “땅 위에 있으면 매의 밥이 될 것이요, 땅 아래 있으면 개미와 지네의 밥이 되겠거늘 어찌 남의 밥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구애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답습니다. 중국 소설가 루쉰(魯迅)도 “장례식을 위해 누구한테고 한 푼이라도 받으면 안 된다. 서둘러 입관하여 파묻어 치워 버릴 것, 무엇이든 기념행사 비슷한 짓을 하면 안 된다. 나의 일을 잊고 자기 생활에 정신을 돌려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바보다”라는 유언을 했습니다.

이런 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결심을 하면 할 수 있는 정도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고 난 뒤의 일을 알 게 뭐며 알아서 뭘 하자는 거겠습니까? 고교 교과서에서 배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네가 장차 볼 길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장으로는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실제 삶은 비루하고 삶의 터는 진흙탕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죽으면서 “나의 영혼은 신에게, 나의 육신은 땅에게 바치며 나의 유산은 내 혈연에게 남긴다”고 말했습니다. ‘르네상스의 거장’이 남긴 말치고는 실망스러울 정도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미켈란젤로는 하나마나 한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인간은 결국 유언과 유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의미 있는 비명(碑銘)과 영향력이 긴 저작물로 남습니다. 이와 달리 순전히 재산으로 남는 인간의 삶은 금세 잊히고 자칫 갈등과 논란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죽기 전에 남기지 말고 다 쓰자, 사회에서 얻었으니 사회로 되돌려주자, 자식들에게 물려줘봤자 싸움만 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재물을 사용하고 소비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다 써야 할 것은 재물이나 인간관계 등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생각과 재능, 그리고 올바른 마음을 나 자신과 남들을 위해 남김없이 다 쓰는 것, 그리하여 꽃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 그게 바람직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한 남김과 남을 위한 남김의 조화를 지향하면서 그 방법을 찾아가는 게 삶의 후반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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