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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검여(劍如)와 남전(南田), 그 아름다운 예맥(藝脈)

기사입력 2016-07-25 17:22

<글> 이재준(아호 송유재)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7년 늦가을부터 종로구 관철동의 고서점 ‘통문관’을 드나들었다. 한문 시간에 설악산인(雪嶽山人) 김종권(한학자1917~1987) 선생님의 <삼국유사> 강의가 너무 감명 깊어 교무실로 자주 찾아뵈었더니 “학교 도서관에는 관련 책들이 별로 없으니 가까운 ‘통문관’에 가서 <진단학보>나 <역사학보>등을 찾아 읽어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통문관 구석에 서서 역사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서점 주인이며 서지학자인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1909~2006) 선생과 가까워졌는데, 동그란 의자를 내어 주며 “맘 놓고 앉아서 책 보게”하여 여러 귀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그곳은 고명한 교수며 석학들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담배 심부름도 간혹 해드린 일이 있었는데, “이군, 이분이 검여(劍如) 선생이시네. 인사 여쭙게”하여 유명한 서예가 유희강(柳熙綱·1911~1976) 선생을 친견하였다.

두터운 뿔테 안경에 수염이 많은 온후한 인상이었다. 검여 선생은 통문관 3층에 서예실을 하고 계신고로 출타할 때는 작품을 통문관에 맡기고, 찾으러 오면 전달해 달라고 하셨다. 산기 선생은 가끔 당신이 부탁한 작품이라며 먹 냄새 싱싱한 화선지를 펴서 한문을 풀어 읽어 주셨다. 여러 작품을 보았으나 ‘文字香 書卷氣(문자향 서권기)’만 제대로 떠오른다.

검여 선생은 인천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을 일찍 여의고 백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3년 과정 기초 학문을 익히고 중국으로 건너가 서화의 견문을 넓혔다. 서양미술 공부에 전념하기도 했으며 중국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시대(220~589)의 비학(碑學; 비석에 새긴 글씨 연구)을 비롯 서첩(書帖)을 두루두루 공부하였다.

광복과 함께 8년간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림(서양화)과 서예에 정진, 1953년 제2회 국전에는 서예와 서양화에 모두 입선하므로 서예가의 반열에 오른다. 검여(劍如)라는 아호는 “검(劍)처럼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고 박처럼 둥근 글씨를 쓰고 싶어 검여(劍如), 석여(石如), 표여(瓢如)의 삼여(三如)라 하려 했지만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검여(劍如)라 했다”고 자호(自號)의 변을 하였다. 그의 글씨는 깊은 학문과 서법의 조예 있는 연구로 중국 위(魏)나라의 웅혼(雄渾)한 서체(書體)를 검여체로 혼융(混融) 발전시켰다. 추사 이후 제일의 서예가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오른손을 쓸 수 없으니 서예가로서 치명상이었다. 이후 가족과 제자들의 희생적인 보살핌과 정신적인 재활의지를 불태워, 왼손에 붓을 잡고 소위 좌수서(左手書)의 시대를 열었다. 왼손 글씨만으로 세 번의 개인전을 열어 그 강인한 의지와 독특한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평소 그분의 작품을 소장하고자 열망하다가 1965년 작 ‘강락무극(康樂無極)’을 20여 년 전 어느 서예가로부터 입수하였다. 글의 뜻도 좋지만 그 힘차고 당당한 검여의 서체가 마음에 끌렸다. 더불어 하세(下世)하기 1년 전인 1975년에 쓴, 좌수서 현판과 행서(行書)의 대련(對聯)도 수집할 수 있었다.

옛 속담에 ‘왕대밭에서 왕대 난다’고 하였듯 검여 선생의 문하에는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1941~2013)이라는 우뚝한 수제자가 있다. 그가 제물포고등학교 2학년인 1958년부터 검여 선생과 인연을 맺어 서울대 농대를 진학한 1960년부터 검여 선생이 서거한 1976년까지 16년간 인격도야의 서예 교습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검여 선생의 관철동 서예실에 상주, 그 서맥을 잇고자 정진하였다. 검여 선생의 뇌출혈 이후는 수족처럼 곁에서 스승을 모셔 좌수서의 그 빛나는 서예 업적을 이루는 데 수훈을 세웠다.

서울의 여러 구청 녹지과장과 서울대공원 식물과장 등의 공직에 종사하면서도 한학, 금석학, 서예의 깊은 연구로 개성 있는 글씨의 세계를 표출하였다. 검여풍의 강건한 북위(北魏)의 해서(楷書), 행서(行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을 두루 섭렵, 1990년에는 서예에 전념코자 공직을 내놓고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으로 이주하고 1999년에 ‘원중식 서법전’으로 남전체의 서예를 발표, 서예계를 긴장시켰다. 2003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에 서원을 짓고 후학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남전 선생이 서울에 주거할 때 수차례 찾아가 그 겸손하고 공손한 인품에 머리 숙인 적이 있었다, 이 작품 ‘피갈회옥(被褐懷玉’은 1979년 38세의 작품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70장에 나오는 글귀로 ‘겉으로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있으나 마음속에는 귀한 옥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선비는 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은유의 의미도 있는 글이다. 힘차고

그러나 거친 갈필(渴筆)의 여백이 남전 선생의 젊은 날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검여 선생의 작품들과 ‘대상무형(大象無形)’, ‘만리무촌초(萬里無寸草)’, ‘일이관지(一以貫之)’, ‘수신독행(修身篤行)’, ‘도광양덕(韜光養德), ‘송암서실(松菴書室)’ 등 남전의 2000년대까지의 작품들을 펴놓고 향을 사르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검여 선생이 평생 경모(敬慕)하던 소식(蘇軾, 東坡1036~1101)과 김정희(金正喜, 阮堂 1786~1856)에서 따온 소완재(蘇阮齋)라는 당호(堂號)를 말년까지 썼듯, 남전 선생도 완당(阮堂)과 검여(劍如)에서 한 글자씩 취해 완검재(阮劍齋)로 당호를 삼아 그 맥을 이었다. 이렇듯 사제(師弟)가 같은 길을 가면서도 각기 우뚝한 예술의 봉우리를 쌓고 새 길을 열어 놓으니 후학들의 홍복일 터이다.

한자 문화권의 한·중· 일 삼국에서만 모필(毛筆)로 된 붓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서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우리나라는 서예(書藝)라 부르되 교육의 필수 요건으로 삼아 수천 년을 이어왔다. 붓은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마음먹은 대로 운필하기가 어려워 오랜 시간 숙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글씨도 흉내[臨書] 낼 수 있고, 나아가 자신만의 서체도 이룰 수가 있다. 하물며 깊은 공부가 없으면 글에 마음을 실어 낼 수 없으니, 붓의 기교만 익혀 먹물로 칠한다고 다 서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은 곧, 글씨로 쓴 사람의 인품과 심상이 배어 나온다는 말이다.

오랜 과정 꾸준히 붓을 잡고 연마해야 성과를 나타내므로, 빠른 결실만을 원하는 요즘 젊은 세대에 맞지 않아서 서예 인구가 급감하는 추세라니 통탄스럽다. 미술품 시장에서도 육칠십 한평생을 서예에 바쳐온 노대가의 작품이 고작 100만 원 미만으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벼루 하나 가득 먹을 갈아 놓고 그 향에 취해도 보고, 붓을 잡고 붓장난이라도 하다 보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고요한 묵상에 잠기게 된다. 힐링은 먼 데만 있는 게 아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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