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관해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왜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지 못했나?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우리의 영역이 만주까지 넓혀졌을 것인데..’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검토하면 이것은 이루기 어려운 목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 간의 관계에만 주력한 신라, 백제와는 달리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을 비롯하여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특히 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감당하기 힘든 세력이었다. 연(燕)을 비롯한 하북의 왕조들은 중국 전체 판도에서는 강대국이 아니었지만 고구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왕성이 점령당하고 왕모가 잡히고 전왕의 묘가 파헤쳐지는 참사도 겪는다. 고구려는 때로는 조공이라는 외교적 수단으로, 때로는 군사력으로 대응하며 힘을 키위 5세기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그 전성기인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였을 것이다.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용병에 뛰어났다’고 평한 대로 광개토왕은 20여 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일곱 차례나 원정을 단행한다. 392년 백제를 침공하여 국도를 포위하자 백제의 임금(阿莘王, 아신왕)은 그의 면전에 꿇어앉아 스스로 “영원히 노객(奴客, 노예)이 되겠다”고 서약한다. 400년에는 신라와 가야까지 진출하여 신라의 ‘국성(國城)’에 가득 찬 왜구를 몰아낸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은 79년간 집권하면서 중국의 여러 왕조를 상대로 고구려의 국익을 극대화한 군주로, 한국사에서 뛰어난 ‘외교군주’라고 칭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북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북위(北魏)와 일면 타협하고, 일면 강공으로 대항하면서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한다. 그리고 당시 중국 왕조들의 외교무대인 북위 조정에 모인 여러 사신들에게 ‘우리가 강하다’는 점을 과시한다. 그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427년) 남진정책을 추진하며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蓋鹵王, 475)을 살해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있었느냐, 그래서 통일의 당위성을 느꼈느냐는 문제가 중요할 것이다. 민족개념이 없으면 상대국은 우리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이웃’일 뿐이다.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합치고 보듬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귀찮은 안보의 적을 혼내주고 복종하게 만들거나 제거할 ‘필요성’만 느낀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이같은 입장에서 대했다.
‘삼국사기’를 검토하면 중국 왕조들에 대해 수세적이었던 고구려의 상황은 최전성기라는 광개토대왕-장수왕 시대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 9년(399) 정월 사신을 연(燕)에 보내 조공했으나, 2월에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오만하다”면서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해왔다. 연나라 군대는 신성(新城, 요녕성 무순시) 등을 함락시키고 700리의 땅을 차지하고 백성 5000호를 옮겨놓고 돌아간다.
그 후 고구려와 연은 서로 상대방을 침공한다. 408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차렸더니, 왕 모용운(慕容雲)이 답례했다. 이것은 북연이 고구려 왕실에서 갈려나온 혈족임을 서로 확인하고 적대관계를 완화한 것이다. 중국내에서 강대국이라 할 수 없는 연조차 고압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고, 고구려는 조공을 보내면서 이를 감내한 것이다.
고구려의 남방경략은 이같이 대륙의 정세 변화를 정확히 읽고 서북국경의 안전을 확보한 시기에 단기적으로 감행된 것이다. 원정은 모두 연과의 전쟁이 일어난 해들의 사이이거나 연과 평화적 관계를 회복한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신속히 철수한다.
통일이라는 대과업은 단기간에 기존 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장기적으로 점령지역에 주둔하면서 평정작업을 벌여 민심을 얻어야 한다. 고구려로서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과의 서북국경에서 안보위협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많은 군대를 백제나 신라에 장기간 주둔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433년)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게 되면서 고구려가 단독으로 남쪽의 두 왕국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었다. 백제와 신라는 가야까지 진출한 고구려의 힘을 목격하고 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자 상호 지원을 ‘암묵적으로’ 약속하는데 이것이 곧 나제동맹이다. 이후 나제동맹은 삼국관계의 안정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550년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곧 이어 신라가 백제의 뒤통수를 치며 이 지역을 탈취할 때까지 삼국은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었다. 정족이란 발이 3개인 솥 모양으로 국제정치에서 가장 안정된 상황을 말한다.
나제동맹 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으면 서로 지원하는 양상을 보였다. 개로왕이 살해당했을 때 신라군이 지원에 나서자 고구려는 철수했다. 고구려가 신라 국경으로 내려오면 백제가 출병하고 고구려군은 그대로 돌아갔다. 만약 중국이라는 외세의 간섭이 없이, 혹은 중국이라는 존재 앞에 고구려가 군사력 일부를 요동에 묶어두면서 삼국관계가 유지되었다면 통일과 같은 대변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제동맹이 무너지고 백제와 고구려가 접근함으로써 신라는 안보위협을 느끼게 된다. 또 589년 중국에 통일제국 수(隋)가 탄생하면서 삼국간의 정세는 급변한다. 고구려-수/당 전쟁은 통일 중국이 고구려를 국경지역의 안보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대비하고, 조공으로 화해를 시도하고 또 포로를 송환하는 등 타협/저자세를 취해도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승리는 국력 고갈로 이어졌으며 신라가 이에 편승한 것이 삼국통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550년 한강유역을 얻은 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세력이 일취월장하여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힘’으로 등장한 신라의 잠재력을 고구려가 간과하여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삼국통일의 정치학><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