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삼국 중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을 차지한 복 받은 나라였다. 그러나 가장 먼저 망했다. 왜 그랬을까?
백제 땅은 고구려, 신라는 물론, 중국, 왜와도 교류할 수 있는 한반도 서남 요지였다. 북으로 고구려라는 강국이 있었지만 고구려는 대부분의 시기 중국의 위협에 대항하느라 여념이 없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 중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백제를 크게 위협하지 못했다. 약체인 신라는 백제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국 간의 전쟁에서 백제가 대부분 공세를 취했다. 황해는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백제를 보호하는 안보의 장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교통로였다. 멸망 당시 호수(戶數)도 76만호로, 고구려 69만호보다 많았다. 역설적이지만 이 축복이 백제 멸망의 원인이었다. 경제적 풍요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여건 속에서 백제는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안보불감증에 빠졌다고 하겠다.
6세기 이후 대외관계에서 백제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동맹외교의 실패도 백제가 제일 먼저 범한다. 백제는 때때로 중국에 접근해서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개로왕은 472년 당시 분열되었던 중국의 최대 강국인 북위(北魏)에 표문을 보낸다. 장수왕 시대이니 고구려의 남진을 우려한 것이다.
개로왕은 “지금 고구려를 거두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를 남기게 될 것”이라면서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마음과 힘을 다해’ 호응하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비질을 하게 하고 아들은 바깥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할 것이라는 등 비굴한 언사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북위가 백제의 요청을 거부하자 개로왕은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끊어버렸다.’ 요즘 식으로 “아니면 말고”라면서 “그럼 관두자”고 한 것이다.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동맹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 행위는 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큰 실책이었다. 동맹관계는 강대국이 주도하며 약소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강대국을 유도하는 데에는 엄중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백제는 잊은 것이다. 개로왕의 편지는 단기적으로는 3년 뒤 이를 구실로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을 죽인 비극으로, 장기적으로는 백제의 파멸로 이어진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삼국통일 이전 시기 삼국은 모두 중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조공 사절의 파견이라는 기준에서는 어느 한 나라가 특별히 열성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589년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는 고구려보다 1년 빨리 사절을 보내 수가 진(陳)을 평정한 것을 축하한다. 수는 백제의 계속된 조공에 대해 “해마다 조공할 필요는 없다”면서 ‘흡족히’ 여겼다. 백제 무왕이 죽자(641) 당 태종은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행했는데, 훗날 가장 친당적(親唐的) 인물로 알려진 신라 무열왕 김춘추가 죽었을 때 당이 보여준 조문 형식과 같은 것이다.
백제는 598년 수가 요동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풍문을 듣고 수에 사신을 보내어 길잡이가 되기를 자청한다. 개로왕이 북위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요청한 것을 반복한 것이다. 그런데 수 문제(文帝)는 “고구려를 토벌하려 했으나…이제 용서했다”면서 침공을 보류했음을 알린다. 이 역시 북위의 답신과 비슷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구려가 ‘고깝게 여겨’ 백제의 국경을 침공한 것도 동일하다. 백제는 성장하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적으로 만든 것이다.
백제는 607년 수에 고구려 토벌을 또다시 요청하고 침공 1년 전인 611년에는 군사일정을 묻는다. 그런데 수가 실제로 고구려를 침공하자 백제는 ‘국경의 군비를 엄중히 하고 수를 돕는다고 공언했으나, 실제로는 두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와도 ‘몰래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양다리’ 작전을 펼친 것이다. (신라도 611년 수에 군사를 청했다.)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던 645년에도 백제는 군사는 보내지 않고 황금색으로 옻칠한 쇠 갑옷을 당 태종에게 바쳤다. 체면치레만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당을 돕기 위해 군사 3만을 출병시킨 틈을 타서’ 신라의 성 7개를 습격하여 빼앗는다. 백제의 신라 공격은 고구려-백제 간에 협력관계가 발동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백제는 중국에게 계속 고구려를 비난하고 있었다.
백제의 자의적인 외교행태에 비해 신라는 왕실 자제나 고위 관리를 수-당의 조정에 보내 우호적 기반을 다진다. 650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다고 지원을 요청하지만 당이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아도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정책 변화를 주시하다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군대를 보내 지원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국가이익’과 ‘국제신의’라는 문제는 국제정치의 오랜 딜레마이다. “국가에게는 친구가 없으며 단지 이익만이 있다”는 말은 영국이 유럽에서 세력 균형정책을 정당화한 논리이다. 대외정책의 최종 결정자는 몰인간적인 국가가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체를 통치하는 군주, 대통령, 총리와 같은 인간이다. 이들은 국익이라는 틀에서 어려울 때 지원한 상대국의 신의도 주요한 고려사항으로 꼽는다.
신라는 고구려-당 전쟁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당에 대해서 신의를 지켰다. 당 태종이 고구려 전선에서 패퇴하여 귀국한 후 ‘요동 전역(戰役)’을 돌이켜볼 때 어떤 기분을 가졌을 것인가는 자명하다.
당은 고구려에 패한 이후 삼국 문제를 한반도의 삼국 관계라는 ‘국지적(local)’ 차원이 아닌 ‘요동문제’라는 ‘지역적(regional)’ 차원이라는 더 큰 틀에서 검토하면서 그들의 정책 수행에 도움이 될 국가가 누구인가 검토하는데, 이때 당의 신라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백제의 흥망을 대외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맹에 살고 동맹에 죽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신라와의 나-제동맹이 운용된 시기에 백제는 안전했고, 이 동맹이 약화하면서 그 대안으로 통일제국으로 등장한 수와 당에 접근하지만 실패하여 망했다고 하겠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삼국통일의 정치학><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