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최전성기는 광개토왕(재위 392~413)과 장수왕(재위 413~491) 시대이다. 아버지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크게 평가된다. 그러나 아들 장수왕은 78년 동안 고구려를 다스리면서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군주로만 잘 알려져 있다.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비문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주었지만 장수왕의 업적은 <삼국사기>에 사실 위주로 짧게 나열되어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한국사에서 중국의 여러 왕조들을 상대로 지금은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조공을 제일 많이 보낸 왕이다.
그러나 장수왕은 분열된 북중국을 중심으로 위-연-유연-송-제-고구려를 둘러싸고 전개된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공을 외교수단으로 최대한 이용하면서 국가이익을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외교군주(diplomat king)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주요한 사건들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보자. 589년 수(隋)가 통일하기 이전 남북조 시대 중국은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혼란이 극심했다. 그 중심 국가는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北魏)이다. 조조의 위와 구분하여 북위라 부른다. 430년대 중반 북위가 요서와 하북 일대에 근거한 북연(北燕)을 공격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장수왕이 먼저 435년 위에 조공사절을 보내 사태를 탐색한다. 위도 사신을 보내 답례한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위-연 전쟁에 ‘참여하지 말 것’, 즉 중립적 자세를 견지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연왕 풍홍(馮弘)도 위와의 전쟁에서 사태가 불리해지면 고구려에 의탁했다가 후일을 도모할 것을 생각하고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망명 수락을 요청한다.
위는 다음해 고구려의 중립을 재차 강요하면서 연의 수도 화룡성(和龍城, 오늘날 朝陽, 요하의 서쪽)에 도달한다. 그런데 장수왕은 위의 중립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 두 강대국이 생사를 건 전투에 몰입하고 있는 중간에 과감히 뛰어든 것이다. 고구려군 수만은 위와 거의 동시에 연의 수도에 접근한다. 화룡성 안에서는 친고구려파와 친북위파 간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자기편을 먼저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친북위파가 먼저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영입하려 했으나 북위군은 의심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돌입한 고구려군은 성을 장악해 전리품을 획득하고 연왕과 다수의 주민을 이끌고 동으로 회군한다. 회군할 때 고구려 군세에 위압된 북위군은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은 무모하게 성 안으로 돌진한 것이 아니라 근왕파이자 친고구려 인사들을 통해 성 안 사정을 파악하고 선수를 친 것이다.
고구려의 간섭을 두 번이나 경고한 북위로서는 연을 멸망시켰지만 연왕은 도망가고 고구려의 반항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꼴이 되었다. 이에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연왕을 ‘압송’하려 하지만, 고구려는 ‘마땅히 연왕과 함께 위의 교화를 받겠다’는 표문을 바치면서 위의 요청을 피해버린다.
장수왕의 외교는 이제 망명객 연왕 풍홍의 처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연왕은 화룡성 함락 1년 10개월이 지나서야 요동 고구려 영내에 도달하는데, 장수왕은 그에게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야숙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들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고 위로한다. 이것은 북연의 황제로 칭하며 고구려를 업신여겼던 연왕을 이제는 고구려왕의 외신(外臣) ‘군’으로 강등시켜 야유한 것이다.
창피하고도 노여워진 풍흥은 ‘황제의 위세를 내세워’ 장수왕을 꾸짖고 허세를 부린다. 정사와 상벌을 자기 나라에서 하듯이 행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을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면서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데려가는 등 압박을 가한다. 풍홍이 ‘이를 원망하여’ 남쪽 송(宋)에 망명하려 하자 송은 438년 7000 병사를 보내면서 고구려가 이들의 ‘호송을 돕도록’ 지시했다. 장수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군대를 보내 풍홍을 죽여 버린다.
466년 북위와 고구려 간에는 양국관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북위는 황제 현조(顯祖)에게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서 황제의 비빈으로 고구려왕의 딸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외교적 탐색을 가동한 것이다. 북위는 과거 연과 혼인을 한 뒤 얼마 안 돼 연을 쳤는데, 사신들이 오가면서 연나라 지세와 형편을 조사했다고 한다. 고구려에 대해 동일한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수와 당의 고구려 침공 직전에도 중국은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세를 정탐한다.)
고구려는 장수왕의 딸이 출가했다고 하면서 아우의 딸을 대신할 것을 청하는데 위는 이를 허락한다. 이어 아우의 딸도 죽었다고 둘러댄다. 위 역시 고구려의 의도를 파악한 듯, 엄중히 질책하고 다른 종실의 여자를 보낼 것을 요구하고 고구려는 겉으로 이에 순응하지만 위의 현조가 죽어 이 사건은 흐지부지해진다.
장수왕 시대 고구려의 위상은 절정에 달했다. 484년 고구려는 북위에 사절을 보내는데, 위에서는 고구려가 ‘강성하다(我方强)’하여 여러 나라 사신들의 숙소를 배정할 때 제(齊) 다음으로 큰 관저를 주어 최상급으로 대우한다. 중국 <남제서(南齊書)>는 이어 위가 여러 사신들을 영접할 때 남제와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했다고 북위에게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고 적고 있다. “우리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가 있을 뿐이오. 다른 외방의 오랑캐는 우리 기마가 일으키는 먼지조차 볼 수 없소. 하물며 동이의 조그마한 맥국(貊國, 고구려)은 우리 조정을 신하로서 섬기고 있는데, 오늘 감히 우리와 나란히 서게 할 수 있소?”
장수왕이 죽었을 때 위의 효문제(孝文帝)는 예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김춘추의 사망 당시 당 고종이 행한 의식과 같은 것으로 상존했던 위와의 관계를 장수왕이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의 여러 왕조나 백제를 상대로 한 장수왕의 외교는 현장에서 정세의 변화를 읽으면서 직접 지휘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40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19세기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나 그 후 유럽의 국제관계를 운용하면서 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동맹관계를 수시로 변환시킨 능력과 흡사하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삼국통일의 정치학><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