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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왕기철 명창, "16살 까까머리, 명창 되기까지"

기사입력 2022-05-10 13:12

‘왕가네 소리판’ 일가를 이루다

(오병돈 프리랜서)
(오병돈 프리랜서)

판소리계에는 유명한 왕가네가 있다. 그 중심에는 왕기철(59) 명창이 있다. 왕기철 명창의 동생 왕기석 명창뿐만 아니라 딸 왕윤정도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왕기철은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다. 판소리꾼이자 위대한 아버지, 그리고 스승인 왕기철 명창. 이 찬란한 5월에 그를 특히 만나고 싶었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안에는 ‘왕 카페’가 있다.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다름 아닌 교장실이다. 바리스타는 왕기철 교장이다. 왕 명창은 교장실을 찾는 선생님들, 손님들에게 직접 커피를 내려서 대접한다.

“요즘 시대에 교장이라 권위를 세운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상대방이 인정해줄 때 나의 권위가 서는 거죠. 저는 우리 선생님들하고도 수평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 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도 하면서 다가서려고 하죠. 그렇다고 해서 약하기만 한 교장은 아니랍니다. 하하.”

왕기철 명창은 1985년 제1회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판소리 부문에서 금상 없는 은상을 받은 이후 전주대사습놀이, KBS국악대상을 휩쓴 ‘당대의 명창’이다. 소리꾼이라는 삶을 이어온 지 50여 년인데, 예술가의 까탈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서 넘쳐흐르는 것은 행복한 기운이었다.

“소리계에서 그래도 이름 좀 있는 사람이 교장으로 있으니까 학생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공연 단체에도 오래 있었잖아요. 멘토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거죠. ‘너희 세대는 나보다 훨씬 더 길이 열려 있다’고 응원해주고, 좋은 기운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교장으로서 제 목표는 다른 것이 없어요. 우리 학생들이 꿈을 꾸고 이루고 행복해하는 학교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스승 박귀희 명창 만나 소리꾼 돼

왕기철 명창의 판소리 오디션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졌다. 왕 명창의 형인 故왕기창은 서울에서 판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왕기창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인 향사 박귀희 명창이 남자 제자를 뽑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8남매 중 일곱째인 동생 왕기철 명창에게 전갈을 보냈다.

당시 왕기철 명창은 전라북도 정읍의 시골에 사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는 그저 형의 부름에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어 신이 났다. 박귀희 명창은 왕 명창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고, 그는 ‘진도아리랑’을 불렀다.

“형님이 잠깐 가르쳐준 대로 소리를 했는데, 뭐 잘했겠어요? 그런데 향사 박귀희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를 듣고 마음에 든다고 바로 제자로 받아주셨어요. 아마 저의 여러 가지를 살펴보셨겠죠. 시골 촌놈에 옷도 남루하고 뭐 볼 것도 없는 저였는데, 선생님은 정말 제 인생의 은인이시죠.”

그렇게 왕기철 명창은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됐다. 박귀희 명창은 현재 왕기철 명창이 교장으로 있는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설립자다. 왕 명창은 국립전통예술고에 다니는 한편, 박귀희 선생의 학원에서 가야금 병창과 소리를 배웠다. 멀고도 어려운 소리꾼의 길, 왕기철 명창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가야금과 소리를 함께 한다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가야금이 되면 소리가 안 되고, 소리가 되면 가야금이 안 되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때 학원은 종로 3가와 창덕궁 사이에 있었는데 그 길을 다니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죠. 소리를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속상해서… 노력해도 잘 안 되니까 속상해서 울었던 것 같아요.”

왕기철 명창은 고등학교 졸업 후 한양대학교 국악과로 진학했다. 당시 한양대학교에서 판소리 전공자를 뽑은 것은 처음이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왕 명창은 ‘판소리 학사 1호’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도 얻었다. 그는 “옛날에는 소리 하시는 분들은 배움이 많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석사, 박사까지 하는 분들도 많다. 소리꾼들이 학문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왕기철 명창은 소리꾼으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01년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던 때라고 밝혔다. 판소리 전공자들은 대통령상을 받아야 명창의 반열에 올라선다고 생각한다. 왕 명창은 1999년, 2000년, 2001년까지 3수 만에 장원을 받은 터라 값진 노력의 결실이라고 느꼈다. 더불어 동생 왕기석 명창도 2005년에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왕기철 명창은 “형제 명창은 우리가 1호”라고 자랑하며 웃었다.

(오병돈 프리랜서)
(오병돈 프리랜서)

교육자 그리고 무대

왕기철 명창은 대학교 졸업 후 1985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은 좋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응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지 못한 것. 국립창극단은 국립극장 전속단체로서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든 ‘창극’을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곳이다.

더욱이 동생인 왕기석 명창은 국립창극단 소속으로 활약을 펼쳤다. 현재 그는 국립민속국악원의 원장이다. 무대에서 소리를 하는 아우가 형은 부럽기만 했다. 왕기철 명창은 무대에 대해 타는 목마름을 느꼈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이 깊었다.

“동생의 무대를 보고 나면 그날 밤 내내 무대 생각이 맴도는 거예요. 무대에 너무 서고 싶은 거죠. 무대에 서야 살아 있다고 느끼니까요. 교직에 있으면 안정적으로 평생 일할 수 있어요.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니까 아내도 아이들도 반대를 하더라고요. 동생도 ‘형은 교육계에 계시는 게 어때’ 그랬는데, 저는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과감히 그만뒀죠.”

결국 왕기철 명창은 13년 2개월 만에 교단을 떠났다. 39세로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왕 명창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단원 시험을 보고 1999년 국립창극단 단원에 합격했다.

왕기철 명창은 당시를 회상하며 “소리는 괜찮게 내는 것 같은데, 창극은 안 해봤기 때문에 연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생 왕기석 원장이 롤모델이었다고 밝혔다. 왕 원장은 17세 최연소 나이에 단원이 되어 약 40년 동안 몸담았다.

“국립창극단에 들어가서 동생과 같이 캐스팅되면 동생이 발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 이런 것을 계속 보고 배웠어요. 특히 1999년 완판 창극 ‘심청전’을 했는데, 저도 왕기석 원장도 심봉사 역을 연기했죠. 그리고 우리 딸 윤정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어린 심청 역에 오디션을 보고 붙어서 저와 같이 연기했어요.”

왕기철 명창은 14년 8개월 동안 국립창극단에 있다가 2013년 다시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7년에 16대 교장이 됐다. 임기가 끝난 후 재임용에 도전해 지난해 17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임기는 2025년까지다. 박귀희 명창이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는데, 그 길을 이어가는 왕 명창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남다르다”고 소감을 전했다.

(오병돈 프리랜서)
(오병돈 프리랜서)

딸과 함께 걷는 국악의 길

왕기철 명창의 딸 왕윤정(32)은 앞서 말했듯이 아빠를 따라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에는 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국립창극단 정단원이 됐다. 왕 명창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왕윤정이 특히 노래를 잘 부르고 끼가 있었다고. 다른 자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왕윤정은 왕기철의 딸이기 때문에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잘해도 본전’이었다는 그녀는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내가 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사춘기 때도 치열하게 열심히 했죠.”

왕윤정은 왕기철 명창에 대해 “아빠와는 친구 같은 사이이긴 한데, 선생님으로서는 엄격하셨다”고 말했다. 왕 명창은 “딸에게 기대도 컸고, 조심스럽기도 했다”면서 “딸이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으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딸의 마음을 헤아리는 위로의 말이었다.

“딸이 저보다 더 실력이 나은 예술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딸이 국립창극단에 들어가고 공연하는 걸 봤는데 소리의 추임새나 테크닉적인 부분도 괜찮고 이제 들을 만한 실력을 갖춘 것 같아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고쳐주기도 하고요. 최근에 딸이 ‘리어’라는 작품을 했어요. 무용학원에 보냈어서 그런지 춤도 잘 추고, 무대에서 잘 보이는 예술 소리꾼이 됐더라고요. 그리고 딸이 저보다 성격도 좋답니다.”

지난 3월, 왕기철 명창은 20년 만에 국립극장에서 흥부가 완창 무대를 선보였다. 표가 보름 전에 매진될 정도로 기대감이 높았기에 그의 부담감 또한 컸다. 왕 명창은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아쉬운 무대를 남기고 말았다.

“공연날 아침에 일어나니 목소리가 확 바뀌었더라고요. 진단 키트 검사를 해보니 음성이어서 공연을 했죠. 그런데 갈수록 컨디션이 최악이었어요. 내 목소리가 이런 소리가 아니었는데 너무 속상했죠. 다음 날 다시 검사를 했더니 양성이었어요. 얼마나 속상하고 아쉬웠는지 몰라요.”

왕기철 명창은 인생의 마지막 완창이 흥부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너무 크게 남아 다시 한번 무대에 서고 싶단다. 딸 왕윤정은 “저는 아빠가 건강만 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고 잘하시는 소리를 오랫동안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완창 무대를 한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에요. 두 시간 이상 대사도 다 외워야 하고, 연습도 많이 해야 하고, 목 관리도 해야 하죠. 이제 완창 무대는 안 하려고 했지만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 예술 무대를 꾸미는 거예요. 왕기석 원장과 그의 딸 왕시연도 소리를 하거든요. 넷이 ‘왕가네 소리판’, ‘왕가네 소리 이야기’라고 해서 무대를 꾸미고 싶어요.”

왕기철 명창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는 소리를 계속할 것 같다”면서 삶을 즐기면서 살 것이라고 했다. 왕 명창은 이전에 성대결절로 수술을 한 적이 있고 현재 98% 회복했다고 한다. 아직 2%는 회복하지 못했지만 “거의 다 되찾았으니 행복하다”면서 웃었다. 그의 긍정적인 생각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틀림없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는 것은 인생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60세에 은퇴했다고 해서 다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고 싶었던 취미도 하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동안은 가족들 생각하면서 열심히 사셨잖아요. 저도 그러려고 하거든요. 저는 무엇이든지 즐기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가 소리를 하면 행복한 무대를 만드는 거고, 그럼으로써 내 소리를 듣는 관객들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에너지를 얻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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