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남자들이 주도하는 종친회 일을 오랫동안 수행 봉사하는 여자 친구들이 있었다. 친해져서 물어보니 오빠나 남동생 없이 자매들만 있다 보니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더 친해져서 자세한 가정사를 물어보니 한스러운 사연을 토로했다.
“우리 집은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만 있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나. 이렇게 넷이서요.”
“어떻게 그렇게 되셨어요?”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부모님과 살다가 제 세 살 때 아버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대요. 그 후 할머니께서 어머니 개가를 강력히 주장하시어 어머니가 떠나가신 뒤론 할머니 밑에서만 크고 학교 다녔어요.”
그 후 자세한 사연을 들어보니 6ㆍ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갔다. 전쟁 중이라 집에서 편한 잠을 못 자던 함평의 작은 시골 마을. 11일 그날도 뽕나무 밑이나 외진 건물에서 자고 집에 들어와 조식을 빨리 먹고 동네 사랑방에 친척 다섯이 모였다고 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친척들 안부와 전쟁 중의 소식을 서로 교환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총을 든 군인이 바로 따라왔었다고 한다. 모두 끌려가서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고 여러모로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틀 후인 13일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참 지난 후 그 군인이 소속된 부대의 부대장이 동네를 찾아와 “모두 잘못 처리되었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사과했으나 구두증거는 남지 않았고 다섯 사람은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64년이 지났기에 가정과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확인해 봤다.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했음은 물론 호적과 가족관계증명서들을 떼어보니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법적 당사자와 재력 가진 종친들이 별로 없었다. 힘들게 사는 종친들을 위로하기 위해 소송봉사를 하고 싶었다. 수원에 있는 친구 변호사를 선임하고 서류를 갖추어 비용을 일부 분담하고 나머지는 당사자들이 부담토록 하여 소송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알아보니 함평 양민학살 유족회에서 조사한 피해자들이 우리를 포함해 천여 명이 넘었고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이미 접수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노령산맥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최종 퇴각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함평지역엔 교전이 많아 시산혈해를 이뤘고 그런 중 양민피해도 컸다고 한다. 2008년 4월 14일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라는 진상은 규명되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3년이 지나갔다.
우리가 어렵게 살아온 종친들을 금전으로라도 위로해 주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2014년은 진상규명 후 6년째였다. 국가권력으로부터 피해를 받았어도 피해 사실이 규명된 후 3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설령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도 국가의 배상의무가 없다는 권위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법이 아직도 살아있었다.
친구 변호사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받은 수임료를 반납해 주었다. 통상 교과서에서 배운 형사 사항의 시효는 7년, 민사사항들의 시효는 10년이라고 알고 있다. 재산에 대한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같이 생명가치에 대한 고귀성과 절대 원칙을 더 세우고 함평 우리 종친들 같은 피해자들과 우리 이웃들을 더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법들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여러 지역에 관계되는 그런 유형의 법들이 여럿 발의되었으나 통과 안 되고 계류상태로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