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유진 작가, “삶의 모든 타이틀은 다 지나가는 것”

엄유진 ‘펀자이씨툰’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사진 촬영을 안 하고 제 그림으로 대신하면 안 될까요?”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익숙치 않아 부끄럼에 쓰러질지 모른다던 엄유진 작가. 그런 그가 인터뷰를 마칠 무렵엔 “기자님들과 기념사진 찍어도 돼요?” 하며 먼저 카메라를 켠다. 타인의 좋은 면을 찾아내는 애정 어린 시선과 기록자의 성실한 기질이 태생적 낯가림을 이긴 것이다. 그의 팬들을 매료시킨 힘이다. 연필 끝으로 그린 일상에 그의 다정함이 오롯이 묻어난다.

저마다 병과 함께 산다
‘펀자이씨툰’을 연재하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엄유진 씨를 서울의 모처에서 만났다. 그는 태국인 남편의 성을 딴 필명으로 가족과 일상의 이야기를 7년째 그려오고 있다. 그는 만화에 런던 유학 생활과 연애, 국제결혼, 임신과 출산, 육아 같은 장면들을 기록해왔다. 그의 가족 구성원은 흔히 사회에서 소수자 또는 약자로 일컫는 노인, 장애인, 어린이, 외국인, 다문화가정, 대형견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생의 톱니바퀴는 부지런히 구르고 굴러,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님은 연로해졌다. 형제 중 부모님과 가장 가까이 사는 딸이자, 일상을 그리는 작가인 그의 만화에서 부모님의 비중이 늘어났다. 유쾌한 태도로 삶을 대하는 엄 작가의 가족은 병과 동고동락하는 태도에 남다른 면모를 보인다. 작가의 어머니 우애령 소설가는 알츠하이머와 공황장애, 아버지 엄정식 철학자는 파킨슨병과 여생을 동행 중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평생 고민했던 엄정식 철학자의 질문이 우애령 소설가에게 넘어간 셈이다. 우애령 소설가는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던 순간 남편에게 “봤지? 약으로 오래 현상 유지가 가능하대. 즉 당신이 올해 안에 새장가 가긴 글렀다는 거야”라고 말해 진료실의 모두를 웃음 짓게 했다. 전쟁을 겪으며 자라, 위기 대처와 생존이 가장 큰 재능이 된 세대에는 질곡의 세월도 유머로 넘기는 힘이 있다.
이 가족의 이야기를 찾아온 엄유진 작가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19만 명을 넘어섰다.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고 신간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1, 2권을 동시 출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기록이다.
“요즘 방송 출연을 계기로 주목받고, 주변으로부터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해요. 그렇다고 저나 가족들을 대단히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여든이 넘은 부모님은 전쟁, 파산과 가난, 이민자 생활과 학자로서의 명예와 존경 등을 두루 거치며 살아오셨어요. 그 가운데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구분하는 지혜를 갖추셨던 것 같아요.”
처음 부모님의 병과 노쇠함을 겪으며 당혹스러웠던 마음도 제법 익숙해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친구의 부모님들도 저마다 병을 앓고 계시더라고요. 마침 아버지가 ‘병 이름을 몰라서 그렇지, 누구나 다 병을 앓고 있다’라면서 ‘파킨슨병 진단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자’고 하셨거든요. ‘무슨 병인지 모르고 증상만 있을 때보다 병명을 알고 난 후 한결 홀가분하다’고요. 그 뒤로 ‘병은 늘 삶과 함께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죠.”
특히 작가의 인식을 확장한 경험에 관해 털어놓았다.
“고관절 문제로 3일 정도 쓰러져 거동을 잘 못 했던 적이 있어요. 도움받을 때의 불편함과 ‘나는 장애인이 아닌데’ 하는 억울함, 숨 막힐 듯한 갑갑함 등을 느끼며 어머니의 공황장애 증세까지 이해하게 됐어요. 그리고 노약자나 장애인, 어린아이도 모두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희 가정은 요양보호사님과 시설에 큰 도움을 받고 있는데, 이런 복지제도가 가정을 살리고 있어요.”

바라는 건 좋은 관계, 좋은 이별뿐
일과 육아, 살림까지 거뜬히 해내는 슈퍼우먼 같던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지고, 환자의 모습만 기억에 남을까 염려하던 시기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기억을 얼마나 잃으셨는지, 나를 잊지는 않으셨는지 매 순간 확인하고 싶을 만큼 불안했어요. 제게 의지하셔야 하는 순간에도 도움을 거부하며 고집 피우실 때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께 화를 쏟아내기도 했죠. 어머니의 발병 후 몇 년은 만화에 ‘알츠하이머’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어요. 독자들이 어머니를 병명으로 규정하거나, 부모님의 노후를 ‘짐’처럼 여길까 봐 걱정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슈퍼우먼이 알츠하이머를 겪으며 또 다른 능력이 생긴 건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시간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사람이 됐다. 딸의 모습에서 여동생을 찾고, 어릴 적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찾는 아이가 되기도 했다. 신간 제목이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인 까닭이다. 이제는 집에 들어서며 ‘내가 누구냐’고 어머니를 시험하지 않고, ‘엄유진! 엄마 딸!’ 하고 들어선다는 그. 모든 기억을 다 잊어도 좋으니, 당사자가 마음 편한 게 최고임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겪어본 적 없는 부모의 노환은 형제간에 없던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는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도 자식들이 경험하는 부모의 모습은 다르다는 말로 운을 뗐다.
“형제들의 마음도 저와 똑같았으면 하는 생각이 강했어요. 내 덕에 부모님이 편하게 지내신다는 자부심으로 내 희생을 다른 가족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었어요. 한편 ‘딸’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역할을 고정하는 메시지처럼 보이면 안 되겠다 싶었고요.”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깊은 병을 가뿐하게 넘기는 부모님의 유머에 반한 독자도 있지만, ‘우리 집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싶어 우울하다는 독자들이 눈에 밟혔다고.
“만화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부모님 노후에 여러 상황을 겪으며 지금 같은 안정을 얻기까지 어려움도 있었죠. 어머니께 ‘만화에 재미있는 장면 말고 힘든 순간을 그려도 될까’ 여쭸더니, ‘행복하고 사이좋기만 한 드라마는 나라도 안 보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폭발하듯 화를 내고 눈물이 쏟아지고 갈등하는 순간을 그렸더니, 독자들의 공감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는 형제들, 독자나 지인도 각자의 자리에서 부모님의 최선을 고민하고 선택했음을 믿기로 했다. 믿음의 힘은 크다. 이후 형제들과 남편의 노력과 고충이 한결 생생하게 느껴졌다. 부모님께 몰두했던 시간을 형제들, 요양보호사와 나누고, 본인의 아이, 남편과 보내는 시간을 확보하며 삶의 균형점을 찾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께 ‘우리는 이제 다 이뤘으니, 아이들만 행복하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결국 부모님도 저도 ‘좋은 관계와 좋은 이별’만을 바라는구나 싶어요. 어머니는 가정의 불화를 신이 낸 퀴즈라고 하세요. 이 문제를 똘똘 뭉쳐 풀어야 더 돈독해진다고요.”
궁극적으로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정’이라고도 했다.
“어머니가 기억을 잃기 전에 아버지는 집안 어른 정도의 거리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자기 세계가 확고했던 아버지가 헌신적인 사랑꾼이 되고, 제게는 어느 때보다 사랑하고 애틋한 친구가 됐어요. 결국 효심이 아니라 우정과 연민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모든 건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아
“독자 마음에 친숙하게 다가가는 범주가 있는 것 같아요. 새로운 누군가를 등장시킬 때 낯선 캐릭터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댓글도 보거든요. 일상을 다룬 만화지만 연출이 들어가요. 흉보기나 자랑하기가 아닌, 둘 사이의 경계에서 균형 있는 연출이 필요해요. 만화를 보고 부모님뿐 아니라 남편이나 형제들, 딸의 팬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면 ‘이번에도 내가 너희를 살렸다’ 하고 즐거워해요.”
그가 처음 만화를 연재한 시점은 마땅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육아하던 때다. 취미처럼 시작한 계정으로 꿈꾸던 출간 작가가 됐다. 부모의 명성이나 힘에 기대지 않고 오롯이 홀로서기 한 것이라 더욱 뜻깊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작가가 된 데에는 독자들의 공이 전부라고 말한다.
“인스타그램에 만화 연재를 시작한 건, 어떤 회사도 일감을 주지 않아서였어요. 연필로 쓰고 그리는 제 작품은 수정에 손이 많이 가 출판계에서 반기지 않았어요. 전용 스캐너도 사라지는 추세래요. 독자들이 없었다면 제 꿈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이번 신간은 편집에 3년 걸렸어요. 이렇게 책을 낼 때마다 독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주시는 게 감사하고, 괜히 지갑을 열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해요.”
독자들이 댓글로 보여주는 세계가 깊고도 넓어 학교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엄 작가. 그와 독자는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독자 사연과 질문에 어머니가 답변하는 라이브 콘텐츠를 한 적이 있어요. 상담학을 전공한 교수셨지만, 조금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실시간으로 답변하실 수 있을까 걱정했죠. 그런데 너무 잘하셨어요. 인상 깊었던 사연 중 하나는 자살을 생각하던 분이 어머니의 답변을 듣고 생각을 고치신 건데요, 나중에 요양보호사가 되셨다는 소식까지 전해주셨어요. 어머니가 한창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거부하셨을 때 이분의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흔쾌히 도움을 받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다시 그분이 저를 구한 거예요. 이렇게 독자들과 만드는 관계와 세계가 제게는 정말 기적 같고 신기해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
시대를 풍미한 유명인도 세월에 묻히고 사라지지만, 결국 ‘좋은’ 이야기는 살아 숨 쉰다.
“다른 힘은 없지만, 좋은 이야기로 우리가 살고 싶은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힘을 보태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엄유진 작가가 포착한 반짝이는 순간과 온기가 독자와 만나 더 큰 세상으로 퍼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