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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재의 약 되는 이야기]전염병을 치료하는 약초요법

기사입력 2015-10-19 15:01

사극이나 역사소설에 종종 나오는 역병(疫病, plague)은 어떤 병일까? 어떤 소설에는 조선시대 한 산골마을에 역병이 돌아 삼분의 일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얘기도 나오고, 다른 소설에서는 호환마마를 ‘역병’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병을 마을에서 몰아내기 위해 병자의 시신을 불태우고, 굿을 하기도 하였다.

황석영의 장편대하소설 <장길산>에도 이 역병은 ‘괴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장길산이 아직 뜻을 온전히 펼치기 전에 금강산 암자에서 운부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련을 하던 때, 고성포 꽃재말에서 이 역병이 출몰하여 마을을 뒤덮는다. 무능한 관아와 무지한 백성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역병의 공포가 번져갈 무렵, 장길산과 뜻있는 몇몇 젊은이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팔을 걷어붙인다. 당시 역병에 걸려 죽은 시신의 모습을 표현한 대목을 보면, ‘온 얼굴에 반점이 돋아나 있었고 열에 떴던 안색은 옹기처럼 탔는데 백태가 잔뜩 낀 입이 흉측하게 벌려져 있었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혈관염증을 일으켜 온몸에 발진을 가져오는 발진티푸스가 유행한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발진티푸스는 비위생적이고 먹을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염병이므로 전쟁이나 기아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당시가 보릿고개였음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는 많지만 묘책이 뚜렷하지 않던 차에 찾은 사람이 의술을 아는 양반의 후예인 ‘설유징’이라는 사람이었다. 도움을 청하러 간 길산과 동료에게 설유징은 소주와 백반(白礬, 광물성 한약, 살균작용이 있다)을 섞어서 그들 먼저 소독할 것을 권한 뒤에 치료약으로 쓰던 승마, 백작약, 갈근, 감초, 생강, 계지, 백반 등을 챙긴다. 이 약재들은 한의학에서도 염병(전염병의 준말)에 많이 쓰이는 약재들이다. 그 외에도 소독을 위해서 살균작용이 있는 석회를 가지고 간다. 현장에 도착한 설유징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먼저 위 약재들을 조합한 발한하열탕(發汗下熱湯)을 달여 먹이고, 끓여서 소독한 물로 몸을 씻겼으며, 백반을 소주에 섞어서 입과 목구멍을 닦아내게 하였다. 결국 괴질은 마을에서 점차 물러나게 된다.

역병과 천연두

그렇다면, 장길산에 나오는 괴질을 뜻하는 역병과 천연두인 두창을 지칭하는 역병은 분명 다른 질병인 것이 확실한데, 왜 역병이라는 표현을 같이 사용하는가? 답을 찾기 위해서 역병의 뜻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식백과를 뒤져보면, ‘세균, 원충, 스피로헤타, 리케차, 바이러스 등으로 일어나는 질환 중 급성의 경과를 거치며 전신적인 증세를 나타내고 집단발생(유행)하는 전염병’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체(病原體)라고 알고 있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 외에도 그 중간 위치에 있는 모든 미생물로부터 발생하는 전염병을 말하는 것인데, 병의 진전 속도가 빠르고 전신에 걸쳐 생명을 위협하는 증상을 일으키며, 음식물이나 사람의 침, 먹는 물 등을 통해 주변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는 것들을 다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한과 발열, 근육통, 구토 등으로 시작되는 전염병의 일반적인 특징을 가진 유행병들을 통칭해서 ‘역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장길산에서 유행했으리라고 짐작되는 발진티푸스는 ‘리케차’라고 불리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중간 크기쯤에 해당하는 세균에 의해서 발생한다.

또 다른 역병 중의 하나였던 천연두는 ‘폭스바이러스’라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발생한다. 역시 영양분 공급이 불충분한 곳에서 유행하기 쉬우나, 분명히 보균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코르테스 군대가 이 천연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원정대로 보내진 코르테스가 황금의 제국이라고 알려진 아즈텍 제국에 아예 눌러앉으려 하자, 당시 스페인에서 토벌군을 보냈는데, 그중에 천연두 환자가 있었던 것이다. 토벌군에게도 승리하고, 제국 전체에 확산된 천연두 때문에 아즈텍이 무너지면서 그 거대한 제국도 코르테스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스페인에서는 천연두가 풍토병이 되면서 침략자들에게는 희생자를 발생시키지 않았지만, 아즈텍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신이 휘두르는 커다란 재앙이었던 것이다.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구급약

한의학을 민족의학으로 전승시켜왔던 우리 조상들은 이 역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수인성 질병이 유행하기 직전인 단옷날에 쑥떡을 해먹는 풍습이 있었다. 한약명으로 ‘애엽(艾葉)’이라고 불리는 쑥에는 비타민A로 전환되는 베타카로틴이라는 물질이 많은데, 감염성 질환에 저항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비타민A가 충분한 것이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쑥에는 살균효과와 함께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운 여름밤에 말린 쑥을 태워서 모기를 쫓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금이 머물던 궁중에서는 ‘제호탕’이라는 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제호탕은 매실껍질로 된 오매육이라는 한약과 사인, 백단향, 초과 등의 한약재를 곱게 빻아서 꿀에 재워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것인데, 일종의 발효식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설사로 시작되는 식중독을 다스리기 위해서 ‘옥추단’이라는 처방약도 구급약처럼 사용되었다. 옥추단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구급약으로도 유명했는데 오배자, 산자고, 속수자, 사향, 주사(수은 화합물) 등의 한약으로 만들어졌다. 또, 앵두를 화채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앵두화채는 갈증을 해소하고 더위를 이기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더운 여름에 체력이 떨어져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 최혁재 약사, 경희의료원 약제본부 예제팀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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