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 감동상]

인생은 버라이어티 쇼다. 다만 그것이 매번 재미와 감동을 전해주는 쇼는 아니라는 거다. 내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것은 진학과 직장, 결혼과 입양, 이혼과 퇴직 등 인생의 중요한 결정적 순간마다 깊이 영향을 주었다.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상실은 나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돌보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했다. 스스로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을 종용했다. 그로 인해 힘든 인생을 자처했고 오히려 외로운 삶을 살았다. 대학 생활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느라 매일 전전긍긍하면서도 몇 개의 후원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가진 것이 없어도 젊음, 그 자체로 견딜 만했다. 특수교사라는 직업도 나의 사명으로 여겼다. 유독 꿈이 많았던 아이는 싱글맘이 되어 양육과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했고, 하고 싶은 것들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는 안온한 삶을 기대했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순탄치 않은 인생은 퇴직하면서부터가 진짜였다.
명예퇴직, 북카페&서점 운영과 책 출간
나의 인생 2막은 북카페&서점을 운영하며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화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특수교사로 21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감하고, 2018년 2월에 명예퇴직을 했다. 그해 봄, 오랜 로망이었던 북카페&서점을 오픈했다. 46세의 나이에 안정된 교직에서 나와 새로운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무모해 보였다. 더군다나 나는 홀로 가정경제와 두 아이를 책임지고 있는 싱글맘이었다. 남들보다 이른 퇴직을 감행한 것은 교직에 첫발을 내딛으며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내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이기심과 자신감이었다. 대학 때부터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경제적 자립을 했고, 가르치는 일에 25년을 매진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설령 북카페 운영이 여의치 않더라도 다른 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북카페&서점을 오픈하기 전에 전국의 책방과 북카페를 돌아다녔고, 편집과 출판 강좌까지 수강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으며, 퇴직 전 마지막 받은 교사 월급의 절반만 벌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북카페&서점은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문화충전소의 역할을 하며 서서히 입소문이 났다. 서울과 지방에서 수원의 구도심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제법 유명해졌다. 커피 전문 잡지인 ‘COFFEE&TEA’에 북카페 특집 기사로 실렸고, SBS ‘시사 스페셜’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쇼핑몰을 운영하거나 저예산 영화를 찍는 사람들, 연인들의 포토존이 되었다. 커피와 책만 판매한 것이 아니라 작가와의 만남, 영화 상영, 독서 모임, 워크숍,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기획했고, 북카페&서점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 ‘당신에게도 낭만이 필요합니다’를 출간했다. 책 출간은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으므로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북카페&서점을 홀로 운영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교직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야생과 같은 사회에서 여성 혼자 자영업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커피와 책으로는 수익이 되지 않았고, 문화 행사는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뿐이었다. 공익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엔 단시일 내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재정적으로는 점점 속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라는 불가항력의 재난이 닥쳤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세상을 만만히 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사업 실패로 아파트까지 잃다
코로나19라는 불청객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북카페는 폐업과 재개업을 반복했다. 오전에는 시간강사로, 오후에는 카페 쥔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유하고 있던 아파트를 헐값에 급매로 처분했고, 매도하자마자 아파트 가격은 거의 두 배로 솟았다. 인생의 격랑 속에 있다 보면 판단력이 정지되는 순간이 있다. 내게 그 시기가 그랬다. 절박한 순간에는 중요한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경제적 타격도 컸지만 심리적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아파트의 월세로 이사하며 서러운 일도 많이 겪었다. 눈물짓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삶을 더 간소화해야만 했다. 두 개의 보험까지 해약하고, 세 군데의 후원을 해지했다. 후원은 내게 조금이나마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긍심 내지는 삶의 의미였다. 경제적으로 힘든 고비에서도 카드 대출을 받을지언정 모질게 이어왔기에 무력감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북카페의 폐업과 사람에 대한 상처, 그리고 아파트 급매 처분으로 인한 자산의 큰 손실… 연이은 불행으로 인해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우울과 고통에 깊이 잠식당했다. 삶에 대한 배신감과 억울한 감정은 무참히 나를 짓밟았다. 위기의 순간에는 자신감과 안정감이 사라진다. 대신 자신의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바라보게 된다. 눈물 마르지 않는 불면의 날들을 보냈고, 급기야 대인기피 증상까지 생겼다.
새로운 도전, 상담교사
연이어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생과 사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를 살린 건 사랑도 희망도 아닌 책임감이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이 살며 겪게 될 아픔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잠깐의 숨돌릴 틈 없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오스카상을 받은 여배우가 한 말처럼, 자식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보다 더 큰 이유는 없었다. 퇴직 전의 특수교사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왠지 실패자가 된 느낌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상담교사 자격증이 있었던 나는 교육지원청의 기간제 상담교사에 지원을 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만 내 자신의 정서적 상태가 상담자로서 내담자를 만날 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불안한 내게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히 성숙한 다음에 상담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위안이 되었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교직에 20년 넘게 있었으니 학생 상담과 부모 상담이 낯설지는 않았다. 전문 상담교사로서 상담 회기가 늘어날수록 점차 변화되는 내담자를 목도하는 일은 실로 보람된 경험이었다. 나는 마음을 다룬 책들을 기꺼이 찾아 읽었고, 독서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속도를 늦추고 외로운 시간들에 머물렀다. 스스로의 한계를 수용하고, 인생의 겨울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나니 조금은 덤덤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자기 알아차림’과 ‘자기 성찰’, 그리고 ‘자기 돌봄’의 시간을 가지며 생채기 난 마음을 점차 보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산책부터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좋은 책과 음악을 가까이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작가학교에 등록했고,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오일파스텔 그림을 처음 그렸다. 몸과 마음을 가꾸고 에너지를 채우다 보면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면이 단단하여 좌고우면하지 않는, 내향인이지만 사교성이 있는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어둡고 긴 터널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물의 성장에 광합성이 중요하듯 사람의 마음에도 때때로 광합성이 필요했다.
암 걸리지 않아 다행인 한옥 집짓기
북카페 폐업 후 기간제 교사로 새출발을 했으나 남아 있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교직을 떠나면서 수원화성에 명예퇴직금으로 구입한 24평의 작은 땅이 있었다. 원래 이 땅에 한옥을 지어 북카페를 하려고 했던 곳이다. 인생이 어디 뜻대로만 흘러가던가? 카페의 입지로 적절하지 않아 다른 건물을 임대하여 북카페&서점을 오픈했던 것이다. 북카페&서점과 아파트도 사라지고 남은 건 애물단지가 된 작은 땅과 집을 짓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뿐이었다. 땅을 팔아 전세금이라도 마련할 요량이었지만 집을 짓기에도 작은 땅이다 보니 매매가 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월세를 전전하던 나로선 그 땅에 한옥을 지어 사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처음에는 지하가 있는 2층의 미니 한옥을 지을 계획이었다. 지하층(16평)과 1층(8평)은 상업 공간으로 사용하고, 2층은 작업실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건축 자금이 부족하여 본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지하층을 포기하고 수원시의 한옥지원금과 은행 대출로 비용을 일부 충당하면 가능성이 보였다. 계획대로 순조로웠다면.
사회는 월세 세입자로 사는 기간제 교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와 가족을 지탱해온 것은 안정된 직장과 내 소유의 집이었다.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삶에 대한 자신감과 자긍심, 긍정적 태도와 에너지가 나의 능력이나 총명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엄혹한 현실 앞에서 나를 믿고 기회를 줄 ‘단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슬펐다. 지금껏 부단히 노력한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한옥은 은행 대출이 막히면서 짓기 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불안불안한 한옥 건축이 시작되었다.
집을 짓는 일은 고되고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다. 설계와 시공 과정에서 별의별 일이 다 생겼고 몇 번이나 중단하게 되었다. 한옥지원금 신청 서류, 극단적인 날씨, 레미콘 파동, 자재 조달, 도시가스 인입, 자금 부족 등 중단의 이유는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였다. 사람들로 인해 눈물로 점철된 밤을 보냈다. 집을 지으며 스트레스로 암에 걸린 지인도 보았고, 대궐 같은 집을 짓고 나서 기뻐할 겨를도 없이 돌아가신 분 이야기도 들었다. 집 짓고 나서 암에 걸리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괜한 농이 아니었다. 혼자 집을 짓기로 마음먹고는 수없이 ‘마음을 내려놓자’를 되뇌었다. 긍정 마인드를 장착했다고 생각했지만 각종 이유로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불안이 엄습해왔다. 누군가 ‘집은 돈으로 짓는다’라고 하던데, 그 말의 의미를 뼛속 깊이 느꼈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돈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건축에서는 금전적 여유가 있다면 사람의 일도 어렵지 않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좋은 건축가를 놓친 것도, 감리자를 따로 두지 못한 것도, 계약서상엔 건축주가 갑이지만 실제론 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돈 때문이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게 그렇다. 금전적 여유가 없으면 선택의 기준이 돈이 된다. 많은 이들이 속도 모른 채 한옥 짓는 나를 부러워했다. 아마 속으로 삼킨 숱한 말과 눈물이 한강으로 흘렀으면 강남 일대에 홍수가 났을 것이다. 6개월이면 완공된다는 한옥은 장장 2년 6개월이 걸렸다. 집 짓다가 암 걸리지 않아 다행이다. (실제로는 작년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몸속 세 군데에 염증 덩어리가 여럿 발견되어 추적 관리 중이다.)
‘한옥스테이 달봄’의 쥔장이 되다
눈물의 한옥 건축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곁에 ‘남의 편’이 아닌 ‘내 편’이 생겼다. 늘 모든 일을 홀로 감내해야 했던 내겐 낯선 안정감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한옥 이름은 ‘달봄’으로 지었다. 한옥 외관에 둥근 창이 있어 달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달을 보다’라는 의미도 있다. 또 ‘달봄’에 머무르는 동안 달콤한 봄 같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애초에 북카페를 하려고 했던 한옥은 두 아이의 독립 후 혼자 살기 위해 지었으나 남편을 만나 다시 용도 변경을 하게 되었다. 꿈같았던 짧은 한옥살이를 뒤로하고 한옥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다달이 나가는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평생 미뤘던 꿈인 그림을 그리려면 재료값도 벌어야 했다. 한옥 달봄은 2층의 아담한 독채 한옥으로 1층은 카페, 2층은 서재 콘셉트로 꾸몄다. 카페와 서재를 통째로 빌리는 셈이다. 솔향기 그윽한 한옥에서 안온한 쉼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팀의 소수 인원만 받는다. 비대면 운영이 원칙이지만 한옥 달봄을 방문한 손님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고 싶어 직접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흔히들 경험자들은 숙박업을 청소업이라고 말한다. 한옥을 방문하는 모든 분의 행복충전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갈고닦는다. 한옥 달봄은 현직 특수교사와 미성년 자녀를 둔 싱글맘에게 50%의 특별할인을 실시하고 있다. 같은 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꿈을 향한 끝없는 도전, 화가의 길
일곱 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유독 꿈이 많은 아이였다. 장래 희망 중 하나가 화가였고, 어린 나이에도 홍대 미대나 서울대 미대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창 시절에 미술부를 했고, 도 단위 미술대회에 나가 상도 받은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막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연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고, 중학교 1학년 때 엄마마저 암으로 떠나셨다. 현실을 직시한 나는 일찌감치 화가의 꿈을 접었다.
인생의 험로를 지나 반백이 넘은 나이에 화가의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홍익대학교 미술교육원을 다니며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지난겨울에는 코엑스에서 그룹전에 참여했고, 봄에는 첫 공모전인 ‘대한민국 종합예술대전’에 그림을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수상 작품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전시했다. 벅찬 감격에 눈물이 났다. 비로소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룬 셈이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겨우 일 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 과분한 성과다. 오래 숙성된 고급 와인처럼 글이나 그림도 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비로소 진가가 드러난다. 초보 작가에게 준 큰 상을 격려와 응원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년 봄에는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인생의 무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남들보다 일찍 인생의 고달픔과 쓴맛을 보았다. 순진하게도 중년 이후에는 ‘화양연화’의 삶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다. 불행이 쓰나미처럼 밀려왔고, 그 상흔은 쉬이 아물지 않았다. 내 삶은 겉으로 보기엔 용감하고 때로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자주 고단했고 순탄치 않았다. 자책하고 깊은 회한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버텨냈고 일어섰다. 혹독한 겨울을 살아낼 방법들을 찾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초년의 결핍은 나를 성취동기가 높고 실행력 갑인 사람으로 이끌었다. 늘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겼으며,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 우물보다는 여러 개의 우물을 팠다. 이런 성향은 삶을 더 고단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했다.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 오십에 들어서며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도 서서히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다. 모든 선택이 해피하게 흘렀다면 아마 나는 인생 예찬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의 겨울을 피할 순 없다. 봄의 새싹도 차가운 눈보라를 무릅쓰고 있는 힘을 다해 꽁꽁 언 땅을 뚫고 나왔을 것이다. 많은 날이 있었고, 기어코 봄이 온 것이다.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낸 많은 날이 쌓여서 마침내 따스한 봄날이 왔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다. 인생 2막에 실패했다고 좌절할 뻔했다. 그토록 모질게만 느꼈던 시간도 흘러 지나갔다. 삶에 지쳐 잠시 물러나 있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현재는 늘 괴롭지만, 마음은 미래에 살 수 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속으로 읊으면서 마음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이제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라고 한다. 인생 2막이 끝이 아니라 인생 3막, 4막도 있다. 인생의 무대에서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류시화 시인은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고 했다. 비바람 뒤에야 무지개가 뜨듯이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또 하나의 계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니 내 삶이 그랬다. 다시 어느 힘든 인생의 순간과 맞닥뜨릴 때 마음속 무지개를 슬며시 꺼내어 볼 것이다.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인디언, 체로키 부족의 축복 기도 중 마지막 구절이다.
“그대 어깨에 늘 무지개가 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