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당에 갔다. 그런데 지옥에 가고도 남을 사람이 천당을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어떻게 천당에 오게 되었지요?”
“제가 몸이 아파 다 죽게 되어서 신부님께 죄를 통회하고 죽기를 기다리는데, 몸이 회복되어 3년을 더 살게 되었어요. 그동안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살았더니 천당에 오게 되었는데 나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그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옥에 내려가니 천당에 있어야 할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당신이 여기서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어요?”
“내가 천당에 갔는데 지옥에나 가야 할 사람이 버젓이 천당에 있어 하느님에게 가서 따졌어요. 그랬더니 하느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못하느냐, 내가 불의한 일을 했느냐 시며 날 연옥으로 보내셨어요.”
사실 꾸민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처음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 품삯은 당연히 일한 만큼 주는 것이 정의라는 고정관념으로,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기던 때였다.
포도밭 일꾼에 대한 비유에서 이른 아침에 온 사람도, 12시에 온 사람도, 오후 5시에 데리고 와 몇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포도밭 주인에 대한 것이다.
한 시간 일 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종일 땡볕에서 일한 사람은 대단한 품삯을 기대하였다. 그러다가 막상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자 당연히 불평 했고 포도밭 주인은 말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여기서 성서학자들은 저녁에 온 일꾼들은 그 당시의 바리사이나 세리 창녀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접받지 못하던 사람들이다.
19세기의 영국의 비평가이며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세상 사고방식의 해악에 대해 말하며 예수님의 비유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인간이 인간의 효용성을 앞세워 인간을 비하시킨다고 했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란 그의 책에서 예수님 세법에 대해 말하며 우리가 그런 세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상은 파고를 넘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드는 경제 논리에 대한 거부이며 어려운 처지의 이웃에 대한 연민을 뜻하는 것이었다.
인도의 지성 간디는 자신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이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라고 말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연민은 사람의 외적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의 세법을 적용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이익이 우선시 되는 경제학을 비판하고 사랑, 생명, 정직, 인도주의적 경제학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사랑과 존엄은 양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족한 상황에 있어도 모두 누릴 수 있어야 하니까.
어수룩하며 있는 것을 나누고, 용서하는 것이 바로 천국 시민의 모습일 것 같다. 얼마나 자잘한 것에 매몰되어 계산하며 살았는가 생각해 본다.
비교하지 말고 돕고 수용하며 품삯을 후하게 쳐줄 수 있을까?
되를 흔들고 누르고 꾹꾹 다져주는 품삯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