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년기자 페이지] 치매에 대한 회포
1~2년 전부터 오락가락하시던 어머님의 정신세계는 아흔여덟이 되던 해에는 하루 중에 많은 시간을 현실과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시곤 했다. 어쩌다 마주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환한 미소로 반기시다가도 깜박깜박 기억을 잊으실 때마다 가슴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여섯 자녀 모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노환까지 겹쳐 힘들어하시는 어머님을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된 것은 그해 4월 초순경이었다. 자식들이 모여 의논 끝에 일단 병원으로 모셨다. 낯선 환경에 갑자기 노출된 어머님이 밤잠을 설치시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다른 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간병사의 얘기를 듣고도 어머님을 다시 집으로 모셔야 된다는 얘기를 선뜻 하는 자식은 없었다. 어머님은 잠깐씩 맑은 정신세계로 나오실 때마다 집으로 가고 싶다고 되뇌셨다.
어버이날을 불과 나흘 앞두고 필자는 3일간의 어머님 휴가를 병원에 신청했다. 요란한 경광등 소리를 내며 응급차를 타고 어머님이 필자의 집으로 오셨고
그날부터 어머님 침대머리에서 간이의자를 펴놓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밤이 되면 “애야, 저기 창문을 좀 열어놓아라” 하시고는 연신 밖을 내다보시면서 알듯 모를 듯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듬떠듬 풀어내시곤 했다. 그런데, 그 지명(地名)이나 단어 하나하나는 어렴풋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들이 틀림없었다. 다음 날 출근하는 관계로 너무 피곤한 나머지 깜박 졸다가 깨어보니 밤새 설치시던 어머님의 머리가 침대 밑으로 축 처져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어머님을 흔들어 깨우니 푸시시 하고 감았던 눈을 뜨셨다. “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어머님이 집에 오신 지 이틀이 지나고 내일이면 다시 병원으로 가시는 날이다. 퇴근길에 사가지고 간 옷을 보여드리고 입혀드리자 어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하시면서 얼굴이 상기되셨다. 옷을 다 입혀드리고 나니 곱디고운 아흔여덟의 어머니가 그곳에 계셨다. 카네이션도 한 송이 달아드렸다. 어머니와 함께 이러저러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는 시키는 대로 표정도 밝게 하시고 포즈를 취해주셨다. 노래 좀 해보시라고 하니 처음에는 입술만 달싹달싹하시다가 누님이 “어머니 좀 크게 해보세요!” 하면서 귀에 대고 소곤소곤 아리랑 선창을 하니 어머님께서 힘을 내어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하셨다. 너무 고운 자태로 차분하게 불러보시는 아리랑! 이것이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어머니의 아리랑이련가?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 중에 ‘사발가’라는 노래도 있었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 요네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던 필자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불덩이가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 급기야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몰려와 결국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말았다. 함께 노래를 부르던 누님도, 아내도 모두가 얼싸안고 흐느끼는데, 정작 어머니만큼은 차분하게 그리고 끝까지 아리랑을 이어서 부르시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들어볼 수 없는 어머니의 노래일까? 아니 어머니 가슴에 달린 빨간 카네이션을 두 번 다시 사드릴 수 없는 세상이 오는 건 아닐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깊은 슬픔을 꾸역꾸역 참아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그렇게 눈물의 파티는 성대하게(?) 끝이 났다. 그날, 병원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 후에도 5년을 더 사시다가 2년 전 103세의 연세로 하늘나라에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