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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서 닦은 워킹 실력으로, 유럽 패션위크 빛냈죠”

기사입력 2025-05-20 08:56

밀라노 런웨이 정복한 시니어 모델, 최영ㆍ로사 배ㆍ김희정

(이준호 기자)
(이준호 기자)

전 세계 패션 기업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밀라노 패션위크의 한 패션쇼장. 훤칠한 장신 모델들 사이로 유난히 작아 보이는, 게다가 흰머리 희끗한 여성이 런웨이에 들어섰다. 대비가 분명한 그 생경한 모습에 관객들의 시선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모델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 모습에 객석에서는 ‘시니어!’, ‘브라보!’, ‘원더풀!’ 같은 감탄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최근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한국의 시니어 모델들이 활약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초대해 만났다. 국내에서도 모델로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는 최영(63), 로사 배(53), 김희정(44)이 바로 그들이다.

패션위크란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최대 규모의 패션 행사로,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이 다음 시즌의 패션 트렌드를 선보이는 무대다. 특히 밀라노 패션위크는 뉴욕, 런던, 파리와 함께 세계 4대 행사로 손꼽힌다.

자사 브랜드의 이미지가 결정되고 천문학적 규모의 매출을 좌우하는 이런 행사에서 모델로 런웨이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델 입장에서도 기회를 얻기 힘든 일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아무나 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차장 런웨이 삼아 연습해

시니어 모델 에이전시 EMA는 지난해 일부 브랜드들과 밀라노 패션위크 기간에 진행하는 ‘Milan Loves Seoul’ 패션쇼의 시니어 모델 공급이 결정되자 공개 오디션을 진행했다. 당연히 경쟁은 치열했다. 국내 시니어 모델 시장은 아직 수요보다 공급이 압도적으로 많다. 설 수 있는 쇼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세계 4대 패션위크라니, 모델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강 EMA 대표는 서류 전형을 거쳐 오디션에 참여한 인원만 240명이 넘었다고 설명했다.

최영 씨는 지하 주차장이 연습장이자 런웨이였다고 이야기했다.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잖아요. 오디션 준비는 해야 하고. 그래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에 맞춰 지하 주차장을 계속 걸었어요. 인기척이 느껴지면 차에서 뭐 꺼내는 척도 하고.(웃음)” 최영 씨는 원래 패션 관련 일을 했던 ‘업계 사람’이다. 알 만한 대기업 계열 패션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고, 중년이 되어서는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얼핏 화려해 보이는 모델 생활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이제는 픽(선택)을 당하는 입장이 됐죠. 클라이언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뽑겠다는 것이 예상되니까 장점이 돼요.”

모델이란 직업은 기량의 많은 부분을 외모로 평가받는다. 당연히 젊고 체력적으로 우월한 모델들 사이에서 시니어 모델이 경쟁력을 갖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워낙 출중한 친구들이 많아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죠. 내가 시니어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만 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만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죠. 유럽의 경우 많은 시니어 모델이 활동하고 있어, 제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더라고요. 쇼 현장에서도 ‘시니어’라고 외치며 더 응원해주어 힘이 났어요.”

▲왼쪽 상단부터 최영 씨의 선다움 패션쇼, 로사 배 씨의 트로아 패션쇼, 김희정 씨의 트리플루트 화보촬영 모습. 아래는 세 명의 모델이 함께 참여한 아혼 화보 촬영 장면.(EMA 제공)
▲왼쪽 상단부터 최영 씨의 선다움 패션쇼, 로사 배 씨의 트로아 패션쇼, 김희정 씨의 트리플루트 화보촬영 모습. 아래는 세 명의 모델이 함께 참여한 아혼 화보 촬영 장면.(EMA 제공)

4대 패션위크에서 모델 데뷔

로사 배 씨는 최영 씨와는 반대되는 케이스. 패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생을 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에 도전하리라는 상상도 못 했다.

배 씨는 어릴 적 눈에 띄는 외모가 오히려 콤플렉스가 됐다고 말했다.

“외모로 평가받는 것이 싫어 일부러 공대를 갔고, 직장도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어릴 땐 모델 등의 제안이 있긴 했지만, 부모님도 반대하시고 무섭기도 해서 못 했죠. 그러다 해외여행에서 시니어 모델이 등장하는 대형 광고를 보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어요.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어서 말이죠.”

사실 로사 배 씨는 제대로 된 국내 무대에 서본 경험조차 없는 초보자였다. 교육기관에서 동기들끼리 기획한 기념행사에 선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고. 경험을 쌓기 위해 오디션에 참여했을 뿐 합격 연락이 올 거라는 기대는 크게 없었다고 했다.

배 씨는 패션 브랜드 ‘트로아(TROA)’와 ‘트리플루트(TRIPLE ROOT)’의 옷을 입고 런웨이에 섰다. 젊은 모델들과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경쟁하듯 런웨이를 걸어야 했다. 그것도 사실상의 데뷔 무대에서. 하지만 그는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디션 때는 무척 떨렸지만, 현지에선 되레 담담했어요. 내 워킹에만 집중하자는 생각뿐이었고, 무대에선 정면의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며 걸었죠. 무대에 대한 공포보다는 희열이 느껴졌어요. 다른 무대에도 계속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엄마에서 한복 알리는 모델로

김희정 씨는 오디션을 거치지 않았지만, 현지에서 모델로 화보 촬영에 참여했다.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서 진행된 플래시몹 행사에서 ‘아혼’의 옷을 입고 공연했다.

김 씨는 스스로를 ‘헬리콥터 맘’이었다고 표현했다. 한때는 외국계 금융사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치과의사 남편을 만나 1남 1녀의 ‘어머니’로서의 삶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집, 학원, 학교를 오가며 계속 고민이 됐어요. 내 인생의 ‘다음’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말이죠. 큰애의 사춘기가 계기가 됐어요. 나도 아직 에너지가 있는데 어디에 쏟아야 하나, 그렇게 운동을 시작했죠. 그러다 주변에서 모델을 권해 도전하게 됐어요.”

김 씨는 “건강하게 잘 늙는 것이 부모님 세대의 고민이었다면, 젊은 세대는 나 스스로를 개발하고 자아를 찾는 것이 중요해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단순히 런웨이만을 무대로 보고 싶지는 않다고 이야기했다. 모델 활동을 경험하면서 패션 산업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됐고, 이를 통해 다양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고.

“두오모 광장에서 관객들과 소통하고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많은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음을 깨달았어요. 이번 경험을 계기로 다양한 활동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한 명의 모델로 바라봐 줬으면

이들의 이야기는 화려한 무대 위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패션위크 기간에 공유 민박 서비스를 통해 예약한 숙소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가족처럼 지냈다. 룸메이트를 정해 함께 방을 쓰기도 하고, 아침에는 누룽지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함께 장을 보고 하루 일정을 조율하며 누구보다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시니어 모델’이 아닌 한 사람의 ‘모델’로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진심으로 준비했기 때문이다. 나이 듦은 그저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특성인데, 일반적이지 않은 특이점처럼 취급당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 모델은 나이가 많다고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으며, 다른 모델들과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동등한 한 사람으로 봐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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