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원형 플레이칸 대표, ‘달려라 하니’ 리부트 작품을 만든 여정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가사만 봐도 멜로디와 함께 곱슬머리에 하트 모양 헤어핀을 하고 ‘엄마’를 부르며 달리던 소녀가 떠오른다. 1980년대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하니가 40주년을 맞아 빨간 스니커즈를 신고 돌아온다. ‘나쁜 계집애’ 나애리와 함께. 두 인물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한 사람이 바로 송원형 플레이칸 대표다.

송원형 플레이칸 대표는 2000년 초 ‘날아라 슈퍼보드’ 2D 애니메이션 회사에 프로듀서(PD)로 입사한 후 ‘라바’, ‘오아시스’, ‘원더볼즈’, ‘티버스터’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PD 경력만 23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송 대표는 2020년 독립해 플레이칸을 만들었다. 플레이칸의 ‘칸’은 몽골 대제국을 이룩했던 칭기즈 칸처럼 ‘북방 유목민족의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레이(Play)는 ‘역할’이라는 뜻으로 플레이칸은 ‘각 분야의 최고들이 모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명화의 가치를 잇다
‘달려라 하니’는 만화잡지 ‘보물섬’에 1985년 1월호부터 1987년 6월호까지 총 30화로 연재됐던 만화다. 이진주 화백이 원작자다. 1988년엔 KBS에서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옥탑방에 홀로 사는 소녀 하니가 중학교에 입학해 홍두깨 선생님을 만나면서 육상 선수의 꿈을 키워가는 성장과 극복을 담은 희망찬 이야기다.
“플레이칸을 설립하고 나서 가벼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했어요. 요즘은 다 웹툰으로 만화를 보는데, 아날로그인 종이 만화는 디지털 작업이 되어 있지 않거든요. 그래서 종이 만화를 디지털화해 유튜브에서 즐길 수 있는 ‘플레이툰’을 만들어보자 생각했어요. 시작이 ‘달려라 하니’죠.”
송원형 대표는 진보된 무빙툰으로 ‘플레이툰’이라는 분야를 만들었다. 홍두깨 역에 홍범기 성우, 하니 역에 강시현 성우의 목소리를 입힌 세미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것. ‘추억의 만화를 다시 보니 반갑다’며 댓글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던 중 2022년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제니가 월드투어 콘서트 사운드체크 무대에 입고 나온 옷이 화제가 됐다. 만화 ‘달려라 하니’의 주인공 하니 얼굴이 그려진 시스루 티셔츠였다. 이 옷은 영국을 대표하는 명품 패션 브랜드 JW앤더슨이 ‘달려라 하니’와 컬래버레이션으로 선보인 의상이었다. 하니라는 캐릭터의 화제성이 여전히 뜨겁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다.
“하니 캐릭터가 활용되는 작업들이 반응이 좋더라고요. 이 작품이 오래도록 이어지려면 지속성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TV 애니메이션만 하더라도 30년도 더 된 작품이어서 권리관계도 불분명하고, 라이선스 작업을 하려니 소스가 없더라고요. 재정비해서 리부트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달리다 보면 만나는 ‘소실점’
이 만화에서 하니만큼이나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캐릭터가 하니의 라이벌 나애리다. 나애리는 작품 중후반인 세계 주니어 육상 대회에서 하니에게 패배한 후 사라지는 캐릭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만화 ‘달려라 하니’ 하면 하니와 나애리를 함께 떠올린다.
“나애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감이 큰 캐릭터인데, 원작을 보면 뒷이야기가 없거든요. 하니 원작의 정체성을 가져오면서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나애리의 이야기를 보여주면 어떨까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진주 선생님이 처음 기획했던 ‘달려라 하니’의 주인공은 하니가 아니라 나애리였다고 하더라고요.”
송원형 대표는 2021년 초부터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입힌 ‘달려라 하니’ 리부트 버전을 기획했다. 파일럿의 파일럿의 파일럿을 거듭해,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리부트 1편을 시작으로 2편도 프리 프로덕션까지 마친 상태다. 리부트 작품에는 주나비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 하니와 나애리의 공동 라이벌로,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3편은 TV 시리즈로 할지, 극장판으로 할지 고민 중이지만 시나리오는 완성됐다. 관객 반응에 따라 주나비 외전까지도 선보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연이었던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해 전반적으로 붉은색과 검정색을 활용해 열정을 표현하고, 챔피언 같은 주인공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하니는 다들 익숙하듯 초록색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이번에는 빨간 스니커즈를 신겼죠. 사실 달리기 선수가 스니커즈를 신고 뛰는 건 상식적이지 않지만요.(웃음) 이번 작품에서 나애리는 ‘달리기’의 의미를 깨닫게 돼요. 나애리에게는 하니가 결국 닿지 않는 선이자 점 즉 소실점이었던 건데, 나애리가 이 부분을 해소하고 한발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극장판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중학생이던 하니와 나애리가 고등학생이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시대 배경도 2025년으로 바뀌었고, 그림체도 요즘에 맞게 다시 그렸다. 작품은 2025년 하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육상이 주제는 아니지만, 영화 ‘분노의 질주’를 떠올릴 만한 콘셉트가 재미를 더할 예정이다. 소실점은 실제로는 평행하는 직선이 멀리 연장되었을 때 하나의 점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두 캐릭터가 나란히 달리다가 점이 되는 순간, 즉 나애리의 소실점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촘촘하게 설계한 ‘시도’
사실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단지 관객 수로 끝나는 게 아니다. 굿즈나 브랜드 컬래버레이션까지 이어지면서 오래도록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다. 송원형 대표는 이번 작품이 관객들과 더 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전 제작부터 ‘새로운 시도’를 촘촘하게 설계했다.
“보통 애니메이션은 배급을 시작할 때 배급사를 찾는데요. 저는 프리 프로덕션이 끝난 상태에서 배급사인 NEW를 컨택했고, 계약을 마쳤어요.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 최초로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거예요. 극장은 상영관을 확보하는 과정이 꽤나 치열한데요. 저희가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상영관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배급사를 먼저 찾았고, NEW에서 저희를 관심 있게 바라봐 주셨죠.”
지난해 9월 송 대표는 유튜브 채널에 트레일러를 선보였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실시간으로 화제가 됐다. 뜨거운 반응을 확인한 송 대표는 이후 공식적으로 ‘달려라 하니’의 리부트를 알렸고, 공식 티저 영상도 공개했다. 그는 또한 지난 3년 동안 OST에도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
“저와 오랜 인연이 있는 노브레인 드러머 황현성 씨가 음악감독을 맡아 7개 곡을 만들었어요. 황현성 감독이 직접 부른 노래도 있고, 터치드 윤민 씨 등이 작업에 함께해 주셨죠. 추가 섭외도 진행 중이에요. 영화 ‘올드보이’ 하면 바로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잖아요. 원작 ‘달려라 하니’도 마찬가지고요. ‘나쁜 계집애’도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대표곡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 송 대표의 새로운 시도는 PPL을 삽입하는 것이다. PPL은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기업의 제품이나 브랜드를 소품이나 배경으로 간접 등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애니메이션도 영화처럼 제작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었어요. 광고비를 제작비로 활용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거든요. 100여 군데에 제안을 넣었는데 네 군데에서 협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애니 곳곳에 PPL을 녹일 수 있었는데요. 이 모델이 성공하면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 수 있겠죠. 애니메이션 공개 후 라이선스 사업이 이어져서 관객들과 컬래버레이션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개봉 전 진행하는 라이선스 협업도 미리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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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인기 만화 ‘달려라 하니’의 리부트 과정에서 조연이었던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선보인 그의 아이디어, 육상 외에 새로운 소재를 덧붙인 흥미로운 전개, 애니메이션 개봉 전 제작뿐 아니라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까지 고민한 꼼꼼함. 송원형 대표가 얼마나 진심으로 이 작품을 대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달려라 하니’ 같은 IP 사업 외에도 애니메이션 제작과 배급을 아우르는 프로덕션으로 플레이칸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어요. 또 다른 레트로 작품도 준비하고 있고요. 사실 처음에 ‘달려라 하니’를 리부트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이야기와 제작 과정을 보시곤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세요. 이진주 선생님도 하니와 나애리의 서사를 잘 풀어주어 고맙다고 하셨고요. 많은 분이 달리기의 의미를 찾아가는 나애리의 여정을 함께 즐겨주시고, 캐릭터들을 오래도록 사랑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