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초반이었나? 그때는 모두가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전화가 있는 집이 드물었다. 병원을 운영하시던 친정아버지는 전화가 필요해서 일찍 전화를 개설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요금이 한 통화에 20원 정도쯤 해서 꼭 필요하지 않으면 이용하지 않았다. 또 시내 전화와 달리 시골에 거는 시외 전화는 요금이 더 비쌌다.
그래서 집에 전화가 없는 사람들이 가끔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우리 집에 와서 "전화 좀 빌려주실래요?" 하고는 통화를 끝낸 다음 한 통화 요금이 20원인데 미안해서였는지 50원짜리 동전을 놓고 가곤 했다. 그러면 친정아버지는 그냥(?) 가시라고 말은 하면서도 얼마 안 되는 요금을 동전으로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친정에서 제일 먼저 결혼한 언니는 주말이면 형부와 함께 주말마다 놀러왔다. 신혼 셋집에 전화를 개설할 형편이 못 되었던 형부는 우리 집에만 오시면 눈치 없이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댔고, 필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대신 언니한테 눈을 흘기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형부는 그때부터 인맥관리를 하고 계셨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가 어렵고 또 요금이 아까워서 전화도 맘대로 못 걸었던 우리 식구와는 다르게 처가집 전화이지만 맘대로 쓰던 형부는 배짱이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형부를 ‘미스터 배짱’이라 부르곤 했다.
필자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하기 전까지 외국 항공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국제전화 요금은 3분이 기본요금이고 3분을 넘기면 아주 비싼 요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3분은 얼마나 짦은 시간인가. 몇 마디 못하고 엄마~ 하고 몇 번 부르면 벌써 3분 초과를 알리는 뚜뚜 소리가 나서 끊어야 했다. 어떤 때는 까짓것 돈 몇십만 원 버릴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엄마 목소리를 실컷 듣고 싶었다. 그만큼 혼자 지내는 외국생활이 힘들고 외로웠다. 그래도 결국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는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모두 지나고 요새는 스마트 폰 발달로 누가 외국에 나가도 로밍이 가능해 카톡으로 매일 소식을 전하고 사진을 올리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며칠 전 뉴욕으로 떠난 손주와 매일 카톡을 즐기니 변한 세상이 새삼 고맙기까지 하다. 스마트 폰 요금도 천차만별이라 알뜰폰부터 데이터 무한사용 조건의 요금까지 소비자가 맘대로 고를 수 있다.
시니어 중에는 청력이 나빠져 통화를 맘대로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요새는 전화보다 카톡이나 메시지가 더 유행이라 굳이 전화를 안 해도 얼마든지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한마디로 살기 좋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