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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 미아리고개

기사입력 2017-04-07 09:30

필자는 어릴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오랜 시간을 돈암동에서 살았다. 당시 돈암동의 랜드마크는 태극당이라는 제과점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할 때 늘 ‘태극당 앞에서 몇 시’ 하면 다 통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규모도 상당히 컸고 빵도 맛있었고 고급 이미지까지 있어 자주 이용했다. 그때는 데이트를 제과점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중학교 때 필자는 전차를 타고 통학을 했는데 전차 종점도 태극당 바로 앞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요즘엔 성신여대 입구 역이 있어 젊은이들로 명동 못지않은 복잡하고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태극당 제과점은 그 자리에 여전히 있지만 규모가 이전의 반 정도로 줄어서 아쉬운 기분이 든다.

이 태극당에서 미아리 쪽으로 넘어가는 곳에 미아리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는 미아리고개에는 ‘한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 있다. 한때 지자체에서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이미지를 없애려고 언덕 양편 축대 담벼락에 샛노란 개나리를 잔뜩 심어 개나리고개로 부르기도 했다. 봄이 되면 언덕 양편에 흐드러지게 피어 늘어져 있는 개나리꽃이 보기 좋았고 한 많은 미아리고개보다는 예쁜 개나리고개로 변신한 것이 즐겁기도 했는데 요즘은 아파트 공사가 많아서인지 봄이 돼도 개나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미아리고개는 노래에도 나오듯 그야말로 한 많은 미아리고개였다. 한이 많다는 표현이 붙게 된 데에는 정말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가 있다. 필자는 6·25 전쟁 이후에 태어나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닌데, 6·25 전쟁이 끝날 무렵 퇴각하던 북한군이 우리나라의 고위인사와 죄 없는 사람들을 북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때 이 미아리고개를 통해 넘어갔다고 한다. 끌려가는 가족을 이 언덕에서 가족들이 지켜보았다니 정말 단장(斷腸)의 고개였을 것이다. 그 당시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노랫말을 들어보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픈 마음이다.

그러나 필자에겐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픈 정서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중·고교 시절 미아리고개 넘어가면 삼류극장인 미도극장이 있었다. 동시상영 극장이었는데 한 번 들어가면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학생은 출입 불가였지만 변두리 극장인 특성으로 무사통과가 돼 자주 영화를 보러 갔던 곳이다. “선도부 선생님이 떴다!” 하면 화장실과 계단 뒤로 도망 다니기도 했던 짜릿하고 신나는 추억도 있으니 필자에겐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프기만 한 고개는 아닌 것이다.

또 다른 기억 속에는 돈암동 쪽에서 바라다보이는 미아리고개 왼쪽 언덕 위에 양옥집이 있다. 그 집은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했다. 그 집을 싸게 사들이려는 사람의 음모였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어쨌든 필자와 친구들은 언덕 위의 그 양옥집을 보면서 오싹함을 즐기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구름다리와 아리랑 아트홀이라는 문화공간이 들어서 있다.

미아리고개를 넘으면 바로 길음 뉴타운이 있는데 멋진 모습의 고층 아파트뿐 아니라 얼마 전에는 유명 여고를 유치하는 등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이상 슬픈 동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필자의 집으로 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길목인 미아리고개가 한과 슬픔의 이미지를 벗고 더욱 발전된 예술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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