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한마디] 3대가 나누는 아버지의 교훈

결혼해 부모님과 한집에 살 때다. 직장에서 이틀간 밤샘 작업을 한 뒤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가 찾았다. 옷만 갈아입고 다시 출근해야 해 서두르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한사코 꿇어앉히고 한 말씀이다. “재미있어야 인생이다.” 뜬금없이 던진 아버지의 저 말은 그날뿐 아니라 살면서 여러 번 들었다.
아버지는 “‘재미’는 ‘양분이 많고 좋은 맛’이라는 한자 ‘자미(滋味)’에서 온 것이다. 재미는 단순하게 즐거운 느낌이 아니다. 생의 에너지다”라면서 “숨을 쉬듯 반복되는 일상, 수행해야 할 역할, 감내해야 할 현실 속에서 사람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재미’라는 숨구멍이 필요하다. 재미는 피로를 견디게 하는 작동 원리이고, 자기 삶을 자발적으로 계속 살아내게 하는 내면의 추진력이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재미를 수차례에 걸쳐 길게 설명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재미는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삶이 책임과 의무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다. 재미없는 인생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은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엔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그 삶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아버지는 “의무감만으로 살아가는 삶은 점점 무거워진다. 처음에는 잘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면은 말라간다. 책임은 무게를 더해가지만, 기쁨은 줄어든다. 그러다 결국 한계에 도달한다. 몸은 움직이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고, 역할은 유지되지만 존재감은 희미해진다. 그렇게 삶은 마치 남의 대본을 읽는 연극처럼 느껴진다”며 나를 돌려세웠다.
아버지 가르침에 내가 덧붙이자면, 삶이 지속 가능하려면 감정이 살아 있어야 한다. 재미는 그 감정을 지켜주는 수문장이다. 아무 재미없다고 느끼는 순간,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외부가 설정한 형식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다. 이성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책임을 지는 것도, 성실함을 유지하는 것도 결국은 어떤 감정적 동기가 있어야 지속된다. 재미는 그 동기의 한 축이다.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오래 버틴다. 흥미를 잃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사람에겐 자기만의 이유가 있고, 자기만의 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의 방향을 정하는 건 단지 옳고 그름만이 아니다. 재미있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 선택은 결과를 넘어서 과정 자체를 지탱해준다”라고 했다. 이어 “재미가 있다면 실패해도 돌아볼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재미가 없다면 성공해도 공허하다. 의미는 있지만 활력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날 아버지는 ‘낙화유수(落花流水)’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순간을 뜻한다. 지나가는 봄의 경치나 또는 힘과 세력이 약해져 물 흐르듯 보잘것없이 쇠퇴해간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 말기 절도사로 민중봉기를 일으켰던 황소(黃巢)를 토벌하는 군의 사령관인 시인 고변(高騈, 821~887)의 시 ‘방은자불우(訪隱者不遇)’에서 유래했다. ‘떨어지는 꽃이 강물 위에 흐르는 데서 넓은 세상을 알고 술에 반쯤 취하여 한가하게 읊으며 혼자 왔다(落花流水認天台 半醉閑吟獨自來/낙화유수인천대 반취한음독자래)’는 구절이다. 아버지는 “재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억지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흐름에 자신을 스스로 열어둘 때 우연처럼 찾아온다”고 했다. 아버지는 흙을 쌓아 산을 이룬다, 작은 물건도 많이 모이면 상상도 못 할 만큼 커진다는 성어 ‘적토성산(積土成山)’(출전: 순자(荀子) 권학편)을 인용하며 “인내를 쌓는 삶이 의미 있으려면, 그 안에 흘러드는 ‘낙화유수’의 가벼움이 필요하다. 인내만 있고 흥미가 없다면, 산은 쌓아지지만 그 안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라며 명심하라고 했다.
의무를 다하되 재미를 놓치지 않는 태도. 역할을 지키되 자기 마음을 무시하지 않는 감각. 질문을 품고, 탐색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기쁨을 추적하는 용기. 손주에게도 물려줘야 할 삶의 자세다. 삶은 반복이고, 무게이며, 지속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건 삶의 가벼운 날들이다. 흥미로운 하루, 웃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 몰입 속에서 흐르는 그 시간들. 그게 없다면 인생은 아무리 정직해도 건조하다. 아무리 성공한 삶이어도 생기가 없다. 그러니 인생은 재미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