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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예술의 고요한 어울림, 풍류 흐르는 안동의 여행지들

기사입력 2024-09-20 08:17

[여행] 정신문화의 가치 지닌 도산서원과 시사단 등 매력적

여름을 보내면서 꺼내 들기 좋은 여행지는 어딜까. 단지 태양을 피하고 더위를 잊게 하는 것만으로 택하는 건 언제 적 이야기인가. 전통과 예술이 자연히 스민 풍경은 호젓한 여유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발길 닿는 곳마다 모든 게 쉼이 되고 마음 다스림의 자리가 된다.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를 이룬, 유・무형의 유교 문화 자원을 간직한 안동이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서원 가는 길 건너편, 시사단(試士壇)

안동에는 도산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되었다. 그중 대표 격인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덕행과 가르침을 기리는 서원이다. 서원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듯 줄지어 선 향나무들이 맞이한다. 도산서당 매화원엔 퇴계 이황 선생이 좋아하던 은은한 매화의 날들이 지나고 여름과 가을이 이어지는 중이다. 도산서원 입구에서 조금 걷다 보면 오른편 나무 사이로 강물이 시원스럽다. 안동댐으로 만들어진 안동호수다. 눈앞에 시사단이 먼저 보인다. 짙어진 녹음 속의 도산서원 너른 마당에서 내다보이는 시사단이 물속에 섬처럼 들어앉았다. 고요하고 잠잠하다. 마주하고 서니 더위 따윈 금세 잊고 만다.  

그 옛날 정조 임금이 퇴계 선생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도산별과를 신설해서 지방 인재를 선발하도록 했다. 이때 응시자가 7000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비문을 새겼고 시사단을 세웠다. 그 뒤 다시 고쳐 세웠지만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물속에 잠겨, 현 위치에서 지상 10m의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원형대로 비각과 비를 옮겨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시사단 주위와 건넛마을이 물에 잠겼을 당시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놓은 다리가 현재 잠수교 형태의 세월교다. 유려한 곡선으로 놓인 다리 덕분에 장마철이나 물의 수위가 높아진 때를 제외하면 시사단까지 걸어서 간다. 강 건너 시사단의 소나무 숲과 비각의 운치가 빼어나다. 서원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기다란 벤치에 앉아 건너편 시사단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을 항상 볼 수 있다. 경북 유형문화유산 제33호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선비의 얼과 멋, 도산서원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돌계단을 오르면서 서원 정원을 기웃거리다 보면 오래된 숲의 기운에 감싸이는 기분이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빛바랜 목재로 된 교육시설을 직접 만져보고 앉아보기도 한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동편 도산서당과 서편 건물이 마주 보도록 자리 잡았다. 후학을 길러내던 공간과 퇴계 선생을 기리는 배향 공간으로 나뉜다.    

도산서원 건축물은 위계질서를 지켜 배치되었다. 이를테면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가장 위쪽으로, 유생들이 공부하는 전교당이 그 아래, 맨 아래 기숙사 순이다. 어느 한 곳 의미가 담기지 않은 곳이 없다. 지형의 높이대로 앉힌 공간들이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었다. 거길 오르내리며 양쪽을 살피다 보면 당시 유생들의 발걸음을 떠올려보는 즐거움도 생겨난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서고를 지나고 몇 걸음 오르면 강학 공간이 나타난다. 당대 명필인 한석봉 선생의 필체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정갈한 현판이 걸린 전교당이다. 당시 선비들이 인성을 기르고 학문을 닦던 강학 공간이 서원의 중심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는 모습이다. 자연이 삶의 일부였던 옛 선비들처럼 오늘날 바라보는 서원의 평온한 풍경이 자연 속에서 차분하게 어우러진다.  

전교당 툇마루엔 외국인 두 명이 서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백 년 전 서원 교육과 이 땅의 학자를 기리는 기관의 고즈넉함에 사로잡힌 듯한 이방인의 모습이다. 한낮의 열기와는 달리 서원 툇마루의 서늘함에 여유로운 풍류가 흐른다. 활짝 열어젖힌 마루 뒷문 넘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대숲이 푸르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시인의 계절, 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은 안동에서도 외진 곳에 있다. 도산서원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편인데, 문학관으로 향하는 길에 간간이 보이는 몇 군데 종택도 들러볼 만하다. 도산서원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지나면 나타나는 퇴계리의 퇴계종택은 주변에 논과 밭을 두고 기품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육사문학관이 가까워지면서 청포도 재배 단지와 264 청포도와인 매장도 지나게 된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해마다 여름이면 한 번쯤 떠올려보게 되는 시구절이 이육사(李陸史) 시인의 ‘청포도’. 시인의 생가터 앞마당에 놓인 청포도 시비를 옆에 두고 읊조리면 더욱 실감 난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서 당도한 이육사문학관은 의외로 적잖은 규모의 세련된 건물이다. 수감 번호 264. 본명 이원록. 그저 이 땅의 대자연을 노래하고 차가운 지성을 외치기만 했던 시인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피 끓는 투사였다. 민족시인의 항거와 뜨거운 일생이 문학관 안에 가득하다. 독립투쟁을 하느라 17번이나 옥고를 치렀고, 치 떨리는 일제 만행의 고문 끝에 40이라는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지만 끝끝내 ‘광야’ 같은 저항시를 내놓았다.  

문학관은 시인의 문학과 민족정신을 알리는 공간이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정리해 모았다. 낙동강을 지나 들녘과 산길을 거쳐 난리통에 고려 공민왕이 피난 왔다는 왕모산이 멀리 보인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세월의 향기에 머물다, 봉정사

이 땅을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건 우리나라에 불교가 없었다면 지금의 역사 유적지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싶다. 사찰을 통한 역사 알기는 매우 유용하고 재미있다. 안동의 봉정사는 시대별 건축물이 절집 곳곳에  남아 있어 역사 속을 산책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은 국보 제15호로 고려시대 건물이다. 극락전 처마 밑을 자세히 보면 양옆으로 세로글씨가 보이는데 ‘主上殿下聖壽萬歲’(주상전하성수만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공민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라는데 이런 글을 발견하는 맛도 특별하다.   

조선시대 건물인 만세루를 오르는 좁고 나직한 돌계단도 예쁘다. 고려 말 조선 초 건물이라는 대웅전은 툇마루가 있는 게 특징이다. 절집을 둘러싼 뒷산의 소나무 자세도 눈길을 끈다. 일제히 산 쪽으로 눕듯이 젖혀져 있는 것은 부처님에게 그늘을 드리우지 않으려는 자세라고 한다. 암자나 정원의 나무 한 그루까지 의미가 담겨 있어서 사찰 전체를 일일이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문에 이어 차남 앤드루 왕자와 신임 영국 국왕이 찰스 황태자 시절에 다녀가기도 했다.

마음 다스림,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안동 여행 중이라면 이곳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우리의 가치 있고 우수한 전통 기록을 엄선해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은 개방형 수장고를 비롯해 총 4개 층으로 스토리라인이 구성돼 있다. 풍부한 볼거리로 유교 문화를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 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서늘하게 보내는 시간이다. 박물관 외부의 자연환경도 차분해서 잔디마당이나 그늘진 회랑에서의 쉼도 평온하다.


(이현숙 여행작가)
(이현숙 여행작가)


옛것과 새것의 조화로움, 안동은 넓고 다양하다

안동은 지방 도시 중에서 제법 넓고 큰 지역에 속한다. 그래서 수도권 기준 하루 여행지로는 아쉽다. 안동의 각 여행지마다 거리도 만만치 않아서 여유롭게 시간을 준비하는 게 좋다. 병산서원이나 하회마을은 물론이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였던 조선시대 누각 만휴정, 벽화마을, 안동댐과 비밀의 숲으로 불리기도 하는 낙동강물길공원 등을 두루 둘러보고 안동소주나 헛제삿밥, 안동간고등어와 찜닭도 고루 맛봐야 한다. 밤에는 달빛 아래 월영교를 걸으며 400년 전 원이 엄마의 절절한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도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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