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왜 그렇게 늘 싸우면서 살까?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데, 정말 그렇게 크려고 그러는 걸까? 이 사람 저 사람과 치고받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1952년에 발표된 노래 ‘통일행진곡’(김광섭 작사, 나운영 작곡)이 떠올랐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195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잘 아는 노래다. 교과서에 실렸던 이 노래는 여학생들의 고무줄놀이에도 꼭 등장했다. 가사 중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가 내게는 이 지사의 모습과 연결된다. 나는 바둑을 둘 때 “에에라 끊자!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아녀?”라는 식으로 그 가사를 잘 써먹었다. 남을 훈수할 때도 그렇고, 좌우간 뭔가 중요한 결단이 필요할 때 쓰는 유행어이기도 했다.
이 지사의 싸움 중에서 특히 내 주의를 끈 것은 그릇 논쟁이다. 주진형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이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을 강하게 비판한 이 지사에게 “그릇이 작다”고 직격하자, 이 지사는 “소수 기득권자가 다수 약자의 몫을 빼앗는 큰 그릇 사발이 되기보다는 다수 국민이 기본적 삶의 조건을 보장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작은 그릇 종지의 길을 택하겠다”고 반박한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은 주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싸우는데, 언어가 천박하고 금도(襟度)와 아량은커녕 상대를 인정하는 여유도, 승복하는 일도 없어 시정잡배들의 이전투구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논리는 뒷전이고 말꼬리 잡기 싸움 일색이다. 그에 비하면 그릇 논쟁은 그래도 좀 영양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하는 것은 오래된 발상법이다. 그릇이 큰가 작은가는 사람을 판단하고 임용하는 주된 기준이었다. 그릇의 크기는 그 사람이 군자냐 소인이냐로 직결된다. 이 지사와 국민의힘 의원들과의 설전에서도 분노조절장애니 소인배니 하는 말이 오갔다. 요즘 어떤 기자들은 대인배라는 말도 안 되는 표현까지 마구 쓰고 있지만, 남을 소인배라고 칭하는 것은 서양식으로 하면 결투 신청감이다.
그릇은 원래 비어 있어야 제 구실을 하는 법. 클수록 담을 수 있는 게 많아진다. 하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큰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다거나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하는데,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는 공자의 말도 잊으면 안 된다. 군자는 형태가 고정된 그릇과 같지 않아서 모든 분야에 두루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니 그릇의 크기를 뛰어넘는 개념이다.
그릇을 뜻하는 ‘器’에는 존중하다, 중시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기경(器敬, 재능 있는 이를 존경함), 기대(器待, 신임하여 예우함), 기망(器望, 기량과 명망) 기애(器愛, 중하게 여기고 사랑함), 기사(器使) 또는 기임(器任), 상대의 재능을 헤아려 걸맞게 부리거나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여 씀, 이런 말에 그릇 기 자가 등장한다. 인재를 가려 뽑는 기인(器人), 일체중생이 거주하는 세계 기세간(器世間)에도 그릇이 나오니 놀랍다.
기국(器局, 사람의 도량과 재간), 기도(器度, 식견과 도량), 기량(器量, 덕량과 재능), 기략(器略, 기능과 계략), 기망(器望, 기량과 명망)… 그릇 기 자의 쓰임새는 많기도 하다. 그래서 천자문의 ‘신사가복 기욕난량’(信使可覆 器欲難量)은 “약속은 몇 번이고 되풀이 실천할 수 있게 하고, 도량은 헤아리기 어려운 경지를 추구하라”고 해석되나보다.
예부터 인물을 평가할 때는 이런 여러 개념을 잣대로 적용했던 것 같다. 최치원의 기록에는 당 태종이 김춘추를 국기(國器, 나라를 다스릴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라며 찬탄했다는 말이 나온다. 반남 박씨와 기계 유씨의 오랜 반목을 해소한 것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인데, 환재는 향시(鄕試, 지방 과거시험)에 장원한 15세 소년 유길준을 집으로 초대해 화해할 때 그가 국기임을 알아보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부마 후보로 올라온 소년을 눈여겨보고는 “이 아이는 참으로 국기가 될 만하다”고 평하고, 후일 재상이 되게 하는 게 좋겠다며 일부러 사위로 뽑지 않기도 했다.
이재명 지사가 과연 국기인지 향기(鄕器)에 그칠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라 실은 가기(家器)에 불과한 그릇인지는 알 수 없다. 독일 속담에는 “접시의 가장자리 너머를 보라”(Über den Tellerrand schauen)는 말이 있다. 그릇 안의 음식만 보지 말고 그릇 너머를 살피라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사물의 현상만 볼 게 아니라 본질적 이면을 폭넓게 통찰하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그릇 싸움’이 ‘도토리 키 재기’(어떤 사람은 ‘벼룩 장판 뛰기’라고 하던데)에 그치면 의미가 없다. 그릇을 겨루면서 서로 커가는 다툼이라야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릇은 물건이나 음식을 담는 기구라는 명사만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잘못되는 것을 말하는 부사도 된다. 그릇은 만들 때 잘못되거나 사용할 때 깨지기 쉽고, 사람이라는 그릇도 그릇되기 쉽다는 함의가 있는 게 아닐까 내 맘대로 생각해본다. 그래서 더욱더 사람은 좋은 그릇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릇 싸움’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한다. 1)코로나 발열 여부를 측정하는 기계처럼 사람이 그 앞에 서면 바로 “당신은 군자(또는 소인)입니다”, “당신은 그릇이 큽니다(또는 작습니다)” 하고 알려주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 2)그래서 그릇이 작은 사람이 그릇이 큰 사람과 싸우면 작은 인형이 큰 인형 속에 쏙 들어가는 마트료시카 러시아 인형처럼, 물 위의 큰 파문이 작은 파문을 휩싸는 것처럼 큰 사람 속에 파묻혀 군말 없이 입 꾹 닫고 살게 하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 누가 이런 걸 좀 발명해보라.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발명품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