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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사표(師表)를 찾아서”

입력 2025-08-10 07: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 대상]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1. 나는 지금도 이순신 장군을 만나러 갈 때면 소년 시절 소풍 전날처럼 마음이 설렌다. 오랜 도시 생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쌓인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은 홀가분함을 미리 만끽한다. 특히 통영에서 배를 타고 20여 분 달려가서 한산도 동백꽃을 구경할 생각을 하면 안달이 날 정도다. 이순신 장군의 영당인 충무사가 바라보이는 홍살문을 지날 때부터 어떤 웅혼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고즈넉한 곳, 영정 앞에 향불을 피우고 소망을 기도하고 사당을 한 바퀴 돌면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도심의 찌든 삶의 때를 푸른 해풍으로 씻어내는 이곳은 나의 최적의 명상 터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좋아서 그를 찾아다닌 지가 벌써 10년이 훌쩍 넘는다. 추우나 더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전국에 산재한 그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일은 과감한 도전 정신이 필요했다. 일련의 도전에서 소소한 행복감은 덤으로 묻어와 인생 2막의 ‘소확행 여행’으로 잘한 선택이라 여기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이순신을 공부하게 되었냐?”고. 이럴 때 나는 대답 대신 짐짓 딴전을 피우거나 대답을 회피하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대의에 입각한 올바른 처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50대 후반, 좀 이른 나이에 스스로 퇴직을 결정하고 인생 2막에 들어섰을 때 앞길이 막막했다. 마침 군대를 다녀온 아들은 도쿄의 요리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아내 또한 일본으로 가서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딸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장의 위치가 불안정해지자 가족은 각자도생의 길로 갔다. 이 와중에 외람되게도(?) 이순신 장군 연구라는 엉뚱한 발상을 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순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일심(一心)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가족들은 “이 무슨 난데없는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의아해할 것 같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가게 마련이던가? 생활인으로서 경제적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 덕택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자급자족의 실용주의자였다. 이럴 때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면 대개 답이 나왔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국민연금을 조기 수령했다. 당장의 생활고를 헤쳐나가는 데 최소한의 밑천이 되었다. 답사를 하다 보면 교통비, 숙박비, 식비 등의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그것도 1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된다면…. 어떤 이가 “국수 사먹으라”면서 돈 10만 원을 준 적이 있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영웅적 대의명분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쩨쩨한 소인배로 살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히 죽고자 하면 산다), 사생유명 사당사의(死生有命 死當死矣, 죽고 사는 건 하늘의 뜻이다). 이순신 장군의 이런 사생관을 굳게 믿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기자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부류의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진정한 사표(師表)는 만나지 못했고 대개의 경우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살아갈수록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된 사람이 몹시 그리웠다. 나는 나 자신이 돈 버는 재주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그렇다고 다시 월급쟁이로 재취업을 한다는 것도 맞지 않았다. 인생 2막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일단 내 인생의 기획자이자 실행자로서 성공하건 실패하건 후회 같은 건 없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특히 남의 통제받기를 싫어하는 성품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맘껏 달래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모래알같이 수많은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써야 할까.


#2. 이순신 장군! 나는 교보문고에서 이순신 관련 도서를 모두 구입해서 커다란 배낭에 넣고 설악산 백담사 입구에 있는 만해마을로 달려갔다. 그곳의 숙소를 빌려 3박 4일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정독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작업이었다. 여러 작가들이 서술한 것을 비교 분석하면서 나는 퍼즐을 맞추듯 이순신 장군의 형상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조각을 하나씩 맞추다 보니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인간상을 가진, 시대의 사표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그의 흔적, 족적, 숨소리를 찾아서 출발 앞으로! 가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낭에 디지털카메라를 넣고 무작정 아산 현충사로 달려갔다. 넓은 현충사 경내는 잘 정비되어 정갈했고 이순신 장군의 넋이 온전히 퍼져 있는 듯 영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현충사 사당의 장군 영정에 참배를 하고 옆의 고택을 둘러봤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장인 방진(전 보성 군수)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결혼해 세 아들과 외동딸을 낳고 살았던 집이다. 뒤쪽에는 장독대가 있었는데 당시에도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니 정겨웠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안에는 7년 전쟁의 기록인 7권의 ‘난중일기’가 있었고, 임금에게 올린 전쟁 보고서인 ‘임진장초’와 사적 편지 모음집인 ‘서간첩’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이 서책들은 이미 한 번 훑어본 것이어서 친근했다. 197.5cm, 2m 좀 모자라는 두 자루의 장검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라는 검명은 즉 ‘세 척 길이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도 빛이 변하도다’, ‘크게 한 번 휩쓰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는 뜻이다. 어디에 내놔도 훌륭한 명문이었고 장쾌한 서사였다. 친필 검명은 이순신 장군의 진충보국하고자 하는 결기를 드러냈다. 불의한 외적의 침략에 대해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애국충정은 선공후사, 임전무퇴, 살신성인의 자세로 나타났다. 나는 이 두 자루의 칼을 보고서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장군의 절대 고독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 대충 훑었던 친필 ‘난중일기’가 내 앞에서 반짝 빛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 1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음력 9월 17일까지의 2539일 중에서 1491일(한산도 1028일)의 친필 기록이다. 어지러운 전쟁통에 쓴 ‘난중일기’는 격동의 시대에 한 인간의 사상이 녹아 있는 거대한 서사로 읽혔다. 특히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영웅의 면모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지들의 건강에 대한 소소한 기록과 동료·친척과의 왕래 교섭, 어머니와 아들을 잃은 슬픔 등 한 인간의 아픈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개인 문집이자 문학 사료로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나는 이순신 장군이 무인이 되지 않았다면 훌륭한 문사(文士)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그는 나에게 ‘달빛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휘영청 둥근 달이 뜨면 한산도 수루에서 지필묵을 준비해서 가슴에 쌓인 소회를 풀어내는 모습이 피리 소리와 겹쳐졌다. 활터에서 활을 쏘고 전장에서 함성을 지르고 일기와 시조를 짓는 그의 다른 이름은 ‘문무겸전의 장군’이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卿)의 회고록인 ‘제2차 세계대전’은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전쟁 문학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난중일기’도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16세기 동북아 3국(조선, 일본, 명나라)의 7년 전쟁을 다룬 대서사로서 손색없다고 믿는다.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3. 내가 ‘난중일기’에서 재미있게 읽은 대목은 이순신 장군이 진영에서 즐겨 드시던 먹거리였다. 종합해보니 장국, 어육각색(쇠고기 내장과 생선전), 장김치, 멸치젓, 와가채(무명조개), 전과(동아전과 동아박 꿀조림), 연포탕, 마른 전복 등이다. 물론 이런 진수성찬이 한 상에 모두 올라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답사를 하면서 하루에 겨우 한두 끼를 먹는데…’ 하는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이내 ‘잘 드시고 건강하셔야 큰일을 하시지 않겠는가?’ 하며 삿된 마음을 다잡았다. 또 고성의 월이, 해남의 어란, 여진 등 전설과 혼재된 기생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장군의 취미로는 휘파람 불기, 점술, 꿈 해몽, 승경도(陞卿圖, 벼슬 맞추기) 놀이 및 활쏘기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동료나 부하들과의 소통 도구로 활용됐다.

고택 옆에는 막내아들 면의 묘소와 청년 이순신을 무과 급제로 이끈 장인(방진)과 장모의 묘가 있다. 무인 출신 장인의 지도 아래 활을 쏘고 말을 타고 달리던 청년 이순신의 늠름한 모습이 선하게 다가왔다. 저 멀리 북쪽으로 9km를 가면 이순신 장군의 분묘가 있다. 답사 당일 마침 중고생들이 단체로 참배하고 있어 사진을 찰칵! 찍었다. 그 아래에는 정조대왕이 지은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가 비각 안에 우뚝 서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흠모해 마지않던 정조 임금은 아산 이순신 묘소 아래에 자신이 직접 지은 글을 담은 신도비를 세워주고,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제갈공명과 누가 우세할지 자웅을 겨루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왕의 금고인 내탕금(內帑金)을 내서 흩어져 있던 이순신의 자료를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다. 왕이 신하의 책을 내주는 일은 없다는 대소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 현양사업을 이어갔다.

이순신 현양사업에 열성인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이순신 유적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 1960~1970년대 현충사 성역화 사업, 한산도 성역화 일환으로 한산대첩비 건립, 노량해전 후 시신이 안치됐던 남해 관음포 이락사(李落祠, 이 씨가 바다에 떨어짐) 현판과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짐) 휘호, 충렬사 현판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이란 글씨도 그의 친필 휘호다. 보천욕일은 ‘찢어진 하늘을 수리하고 해의 먼지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위대한 업적’을 뜻한다. 그리고 충렬사 가묘 터의 식수(植樹)도 있다.


#4. 이순신 장군의 얼과 리더십의 문헌적 연구를 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순신 유적 답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숨결이 닿아 있고 발자취와 흔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갈 태세로 강행군은 이어졌다. 현충사를 답사한 날 그토록 목말라하던 사표를 만났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으로 자축 파티를 했다. 저녁때 식당에서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국민 멘토’의 유적지를 답사하는 계획을 짜면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백의종군길, 수군재건길이 목적지였다.

답사가 없는 날이면 이순신 관련 책과 논문을 독파해나갔다. 빨강, 파란색 펜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고 어느 책은 몇 번씩 읽다 보니 책이 울긋불긋 지저분해졌다. 나의 독학 공부법은 역사적 사실의 전후 맥락을 떠올리면서 마치 수험생처럼 달달 외우는 게 기본이었다.

류성룡의 ‘징비록’, ‘선조실록’, 임진왜란 관련 논문들 및 19세기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의 이순신 존숭을 담은 기록들도 독서 목록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이순신 존경에 관한 언급은 놀라웠다. “나와 넬슨은 국가 총력전으로 앞장섰지만, 이순신 장군은 나라의 지원 없이 10대1의 열세를 극복하고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 일본 해군은 명량해전 외에도 한산해전, 노량해전 등 패전에서 교훈을 얻으려 이순신 장군의 전략 전술을 분석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우리보다 더 많이 이순신 장군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 한 사람이라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향학열이 불타올랐다.

전국적으로 보면 경상남도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인 세병관(국보 제305호)과 3년 7개월 근무한 한산도의 제승당, 여수의 전라좌수사 임지였던 진남관(국보 제304호) 등이 주요한 답사 포인트다. 여기를 중심으로 뻗어가면 한산해전, 노량해전, 명량해전 등 23전 23승의 전승지를 답사할 수 있다. 첫째 답사지로 정한 곳은 경상도 지역의 통영, 한산도, 거제, 부산, 진해, 창원, 마산, 사천, 고성, 진주, 남해 등이다. 이 지역을 모두 다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쪼개서 답사 일정을 짜야 했다. 두 번째 전라도 쪽 답사지는 여수를 중심으로 순천의 왜성, 목포, 진도, 해남, 구례, 광양, 보성, 완도, 강진, 고흥 및 수군재건길이다. 이 또한 수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서울 의금부에서 나와 남대문을 거쳐 경상도 합천 권율 도원수 진영으로 가는 백의종군길이 추가되었다. 이러다 보니 10여 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전국의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는 거의 다 여러 차례 밟아봤다. 북한에 있는 곳을 빼고는 말이다. 1576년 무과 급제 후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파견된 초임지인 함경도 동구비보와 1583년 함경도 건원보, 1586년 조산보, 1587년 녹둔도(지금은 러시아령) 둔전관 시절 여진족과 전투한 땅 등은 통일 후 답사로 미루었다.

차량 이동이 아닌 뚜벅이의 도보 답사여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간간이 지인의 도움으로 차를 타고 답사를 했다. 혼자서 답사에 나서는 것은 또 다른 장점은 있다.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이순신 장군과 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다. 해남에서 완도의 고금도 이순신 진영을 가자면, 1~2시간마다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승차 후 배 타는 곳까지 가서 섬에 도착한 뒤 답사지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돈이 들고 번잡한 여행이지만, 불평불만은 금물이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답사이고 또 존경하는 스승님을 뵈러 가는 답사가 아닌가 말이다. 이렇게 전국 각지를 돌다 보면 자연히 다리운동이 됐고, 낯선 동네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각졌던 마음이 풀어져 너그러워지는 것 같았다. 초행길에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고마운 은인이었다. 세상에 고마운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답사 도중 맞닥뜨리는 사소한 어려움은 이순신 장군이 당했던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으므로 훌쩍 넘길 수 있었다.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남해의 충렬사를 찾아가던 어느 여름날, 관음포 기념관 해설사의 말만 믿고 뙤약볕에 물도 없이 거의 두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일사병으로 쓰러질 뻔했지만 저 건너편에 드넓게 펼쳐진 순국의 바다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세상만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 3시경, 식당의 여주인은 카메라를 내려놓은 나에게 “왜 점심을 거르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순신 장군 답사를 하다 보면 그렇다”고 하자, 시킨 회덮밥 외에 주방에서 서더리탕 한 냄비를 끓여와서 “좋은 일을 한다”면서 건넸다. 마침 바로 앞에는 해군사관학교에서 기증한 거북선이 두둥실 떠 있었다. 고생 끝에 소소한 행복을 진하게 느낀 날이었다. 또 거제 옥포해전지 답사를 갔을 때 식당 여주인은 계란프라이를 서비스로 주었는데 그 고마움의 여운이 남아 있다. 해남의 땅끝마을 미황사에서 점심 공양으로 먹었던 들기름 두른 비빔국수의 맛은 아직도 고소하다. 물론 통영과 여수에서는 싱싱한 횟감을 식탁에 올려놓는 호사도 누려봤지만. 통영의 거북선 세 척이 있는 문화마당 뒷골목의 돼지국밥, 서호시장 시락국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진미였다.

답사 후 찜질방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깨끗이 목욕재계한 뒤 다시 답사를 하는 과정은 연속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발포만호 때의 유적을 찾아서 고흥 땅을 찾았다가 막차를 놓칠 뻔했다. 그 버스를 놓치면 먹고 잘 곳이 마땅치 않은 오지였다. 막 뛰어가서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탄 안도의 기분! 가슴을 쓸어내리며 읍내 식당에서 늦은 저녁 회덮밥에 소주 한 병은 피로회복제로 모자람이 없었다. 이제는 소주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번은 순천의 이순신 유적지와 왜성(倭城) 답사를 갔을 때 만난 한 촌노가 “돈이 안 되는 일을 하는구만”이라며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라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그렇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일은 ‘영양가 없는 허업(虛業)’일지 모른다.

혼자 걸으며 자신만의 오롯한 시공에서 명상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남해의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관음포 해전지를 찾아가는 이락사 뒤편 숲속 길은 새소리가 낭랑한 힐링의 공간이다. 또 한산도의 한산해전기념탑을 찾아가는 산꼭대기 호젓한 오솔길도 정답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한산해전의 격전지는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느냐는 듯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답사를 하다 보면 숨겨진 비경(祕境)이 눈에 띄었다.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아 더없이 귀하고 소중했다. 아리따운 자태의 동백꽃은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에서 마주치는 선물이다. 여수 오동도, 통영 한산도, 거제 옥포, 부산 동백섬, 남해, 해남, 진도 등 어디에서고 동백꽃은 이순신 장군의 영혼인 듯 이 땅에 환한 미소를 던져주었다. 엄동설한을 견디어 이겨낸 강인한 동백꽃은 머리째 떨어진 낙화가 되어 차마 밟지 못하고 피해서 가야 한다.


#5. 나는 이순신 장군 책을 쓰기로 했다.

나는 KTX나 버스, 택시 등으로 이동할 때 아무리 피곤해도 졸지 않으려 애쓴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에서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빛의 양이 달라짐으로써 하나의 피사체는 그 모습이 제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사진 조각을 모으면 역사의 흔적이 되고 또한 영원한 기록물이 될 것이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스마트폰 촬영을 한 사진이 10여 년 동안 1만여 장이나 모였다. 사진에 글을 입히면 책이 된다. 뚜벅이가 발품을 팔아서 모은 재료가 담긴 ‘이순신 유적답사기1’은 2018년 마산의 한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당시 나는 진해에 머무르면서 개관을 앞둔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의 이순신 기념관 및 조형물, 영정, 전투도 등 사료의 고증 자문을 맡고 있었다. 나는 자문료를 책의 출간에 썼다.

저술로 말하자면 이보다 앞선 2016년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이 먼저 나왔다. 출간되자 언론 인터뷰가 나가면서 세상에 처음으로 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후에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 서울의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역사 관련 책을 쓰자면 우선 역사적 사실과 고증 등 학술적 자료와 지역 정보와 소문, 풍문 등 공간적 취재 범위를 넓혀서 꼼꼼히 다루어야 한다. 뚜벅이로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산재한 수많은 유적지를 답사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네 권의 책이 나왔다니 참으로 부지런히 달려온 것 같다. 밥해 먹고 도서관 가서 책 읽고 쓰고, 답사하는 게 나의 일상사였다. 어서 빨리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보니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책을 쓴다는 게 얼마나 고독하고 힘든 일인가. 그러나 오히려 호기심이 앞서 즐거웠다. 마침내 진해의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가 개관했다. 창원 시장과 도청 고위 공무원 및 해사 고위 장교들에게 저자 친필 사인을 해주었다. 중앙홀에는 내가 사료에서 추린 이순신 장군의 진중음(陣中吟, 진영에서 쓴 시조) 20여 편이 전시되었다. 센터가 오픈한 뒤 공무원과 군인 및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이순신 인성과 리더십 강의를 했다. 칠순을 넘긴 한 퇴역 해군 제독은 내 강의 단골 청강생이었는데, “너무 재미있어 찾아온다”고 했다. 강의 후 진해 속천항에서 수강생들을 태우고 출발한 유람선은 거제 칠천량 해전지 앞바다까지 갔다가 다시 안골포, 웅천 해전지를 돌아오는데, 나는 마이크를 잡고 여행 가이드처럼 당시의 전투 상황을 재현하듯이 설명했다.

“총통이 꽈광 꽝! 하고 발사되자, 적장이 탄 휘황찬란한 아타게부네(안택선)와 군선 세키부네(관선) 대여섯 척이 우지끈 뚝딱! 부서지며 기울어졌다. 이윽고 불화살을 맞은 배들은 화염을 뿜으면서 서서히 수장되었다. 승전고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함성, 살려달라는 아비규환의 비명이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는 연극배우처럼 몸짓하고 발성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강의가 끊기자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6. 내가 만든 길은 또 다른 길과 연결되었다. 해군협회 안보 세미나의 이순신 관련 토론자로 참석했고, 해군협회지의 원고 청탁을 받아 ‘통영의 이순신, 여수의 이순신’을 기고했다. 그리고 한 단체의 논문 공모전에서 ‘국가 지도 이념이 된 이순신 정신’이 당선되었고, 몇몇 학회지에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이순신 현양사업에 대한 연구’ 등이 게재되었다. 이렇게 책이 나오고 논문이 잇달아 나오면서 모 언론에 ‘이순신 인성과 리더십’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서 6회에 걸쳐 이순신 정신과 전략 등을 전파했다. 이후 보훈교육연구원이 실시하는 교장·교사 대상 안보 투어 강사로 초청받아 활동했다. 1박 2일 일정으로 이들에게 통영의 세병관, 한산도 진영, 여수의 진남관 및 거북선 등 유적을 설명하고 인성과 리더십을 알리는 일이었다. 또한 ‘충무공의 후예’인 해군 제2함대 장병들을 대상으로 이순신의 안보 전략 리더십을 강의하면서 자긍심을 한껏 높였다. 이제 네이버에서 내 이름과 이순신을 치면 언론 인터뷰, 서평, 강의 등 많은 자료가 나온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이순신 연구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2년 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순신 장군의 피와 눈물의 백의종군 상황을 다룬 역사소설 ‘이순신의 항명: 광화문으로 진격하라’가 출간되면서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 된 것이다. 어릴 적 꿈이 60대 후반 늦깎이 소설가로 실현된 것이다. 어느덧 이순신 장군을 공부한 지가 10년이 넘어 서재에는 이순신 관련 서적과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첫 답사의 날을 떠올리면서 지나온 발자취를 반추해보니 ‘참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지인은 “교수님, 이제 이순신 책 그만 좀 쓰이소”라고 채근한다. “그럴까~”라고 말은 하지만, 나는 완결편을 쓸 요량으로 속으로 또 다른 구상을 하는 중이다. 어린이용 이순신 소설일 수도 있고, 대미를 장식하는 평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순신 장군이 가장 오래 근무한 한산도 주변에서 집필을 했으면 한다. 통영은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김상옥 등 문인과 화가 전혁림, 음악가 윤이상 등 예술가들을 배출한 ‘예향(藝鄕)’이다. 또 시인 백석과 화가 이중섭의 흔적도 남아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충렬사는 ‘달빛 시인’ 이순신 장군이 계신 곳이기에 어떤 문학적 영감을 던져주시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게다가 통영은 싱싱한 바닷고기가 지천으로 깔려 먹거리도 풍족한 곳이다.

도쿄 요리학교를 나온 아들이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됐다. “이순신 연구가가 일본 며느리를 얻었다니 좀 이상하지 않나?” 한 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내가 공부하는 것은 항일이나 반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불의의 침략에 맞선 난세의 위인을 연구하는 것”이라면서 “이젠 지일, 극일한 상태에서 이웃끼리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새로운 이순신 리더십이 아닐까”라고 말해주었다.

통영 미륵도의 고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기념관에 들렀을 때 선생이 남긴 말이 기억난다.

“이순신 장군은 시대가 도달해야 할 인격의 전형이다.” 그 인격 가운데 나는 장군의 선공후사 청렴성을 우선 꼽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부정부패한 탐관오리들이 득시글거리는 시대다. 오로지 청렴 하나로 초지일관했던 이순신 애민 정신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교훈일 것이다. 1582년 이순신이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종4품)로 재직 중 군기 경차관(합참 전시 준비 태세 점검자) 서익의 무고로 억울하게 파직되자, 류성룡은 이조판서인 율곡 이이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덕수 이씨로 같은 집안 사람(19촌 숙질 간)이라 만날 수는 있지만, 인사를 담당하는 고위 관리를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거절했다. 이 장면에 감동했던 나는 몇 년 전 국민권익위원회의 청렴전문강사 모집에 주저 없이 응모해 청렴연수원의 청렴전문강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대한언론인회 회장님의 전화가 왔다.

“나 회장이오. 다음 달 현충사에서 이순신 관련 세미나를 하는데 발표자로 지목됐소. 제목은 ‘이순신의 소통 리더십’ 언로(言路)야.” 언론인의 메시지 전달은 간단하다.

며칠 후 부회장님이 또 전화를 했다.

“원고를 빨리 줘야 여기서 자료집도 만들고, 토론자들에게도 전해줘야 하고. 사진도 몇 장 넣자고.”

“아, 네, 요즘 괜히 바쁘네요. 지방에 갈 일들도 생기고….”

“아니 김 박사 정도면 하룻밤에 후딱 안 되나?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인데.”

나는 어느새 중앙 언론사 출신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인정하는 이순신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이순신 자료를 후딱 만들어내는 선수로 아는 만큼,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약속한 날보다 먼저 원고를 마감했다. 후유~ 전문가는 정말 힘든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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