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장수 시대다. 환갑나이는 나이도 아니다. 경로당에는 입학자격도 없다. 칠십은 먹어야 겨우 명함을 내밀 정도다. 오죽하면 칠십 된 분도 ‘경로당 형님들이 술 심부름 시킨다’고 발을 끊으셨다 하지 않는가? 의학이 발달한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경제적 풍요가 가져온 혜택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은 시대를 잘 타고난 행운일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학생 때 좋아했던 시와 시인의 사연 그리고 단명한 문인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다. 그중 하나가 교과서에도 실렸던 ‘초혼’이란 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로 이어지는 시다. 전 국민 애송시 1위인 김소월 시인이 쓴 시다.
김소월은 만 14세가 되던 해 한 동네에서 자란 첫사랑 ‘오순’을 두고 조부에 의해 정혼을 약속한 ‘홍실단’과 강제 혼인을 하게 된다. 얼마 후 ‘오순’이 19세에 시집을 가면서 둘의 인연은 끊어졌다. ‘오순’은 결혼 3년 뒤 의처증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소월은 첫사랑 ‘오순’의 장례식에 갔다가 돌아와 피를 토하며 시 한 편을 쓴다. 그 시가 ‘초혼’이다.
‘임의 노래’ ‘접동새’ ‘진달래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 훗날’ ‘못잊어’로 이어진 첫사랑의 그리움이 ‘초혼’으로 마지막 불꽃이 되어 타오르며 막을 내리게 된다. 그녀가 죽은 후 소월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술로 날을 보내다 32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 짧은 생에
동안 쓰인 500여 편의 시는 주로 15세 이후 20세 초반인 6~7년 동안 쓰인 시다.
김소월의 시는 많은 가수에 의해 노래로 불렸다. 진달래꽃(신효범, 마야), 먼 후일(최진희), 초혼(이은하), 못 잊어(장은숙), 그리워(양현경), 접동새(김수희), 부모(박일남), 엄마야 누나야(정여진), 개여울(정미조), 접동새, 팔베개 노래(김수희 낭독), 산유화(조수미) 등. 그만큼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애송시가 되었다.
그렇게 국민의 사랑을 받는 김소월의 짧은 생애 못지않게 비슷한 시기에 요절한 문인들이 있다. 세상을 일찍 떠난 사연들도 많지만 어쨌든 안타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다.
김소월(1902~1934) 32세, 나도향(1902~1926) 24세, 이효석(1907~1942) 35세, 김유정(1908~1937) 29세, 이상(1910~1937) 27세, 윤동주(1917~1945) 27세. 박인환(1926~1856) 30세, 그야말로 샛별 같은 생을 살았다.
이분들이 요즘처럼 70~80세 정도만 살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을 발표했을까? 아마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름에 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듯싶다.
흔히들 하늘나라는 천명을 다한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생각을 한다. 죽어서 밤하늘의 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젊은 나이에 하늘로 간 문인들은 하늘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아마도 노인정에도 갈 수 없는 아기별이 되어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