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정(芙蓉亭)
필 자가 근무하는 연지동 주변에 창덕궁이 있다. 점심식사 후 가끔 산책을 하기도 하는데, 궁(宮)을 죽 걸어 들어가노라면, 규장각(奎章閣)과 그 앞의 부용지(芙蓉池)라는 연못을 만난다. 이 연못 남쪽에는 열십자 모양으로 생긴 부용정(芙蓉亭)이라고 하는, 아름답고도 독특한 형태의 정자가 눈길을 끈다.
부용정은 궁궐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3년(1707)에 이곳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는데, 정조 때에 이를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이라 바꾸었다고 한다. 즉, 정조임금께서 지금과 같은 톡특한 형태로 건물을 개축(改築)하였다는 말인데, 총명하기로는 조선 역대 임금 중 손꼽히는 그가 왜 이와 같은 독특한 형태의 건물을 지었을까? 여하튼, 정조임금께서는 이 건물을 짓고 난 뒤에, 꽤나 이를 사랑하셨던 것 같다.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여기서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오니 말이다.
한문에는 ‘전고(典故)’라는 것이 있다. ‘용전(用典)’이라고도 하는데, 과거의 유명한 사건이나 문장 등을 짧은 성어(成語)에 담아내어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부용정도 또한 건축물로서 표현한 하나의 전고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일단, 이 건물의 생김새를 보면 열십자형으로 되어 있다. 즉, 위에서 조감(鳥瞰)하면 ‘아(亞)’란 글자의 형태가 된다. 그러면, 이 ‘아(亞)’란 글자로 무엇을 나타내려 하는가? 유교의 세계에서 ‘아(亞)’란 곧 ‘아성(亞聖)’, 즉 ‘맹자(孟子)’에 대한 존칭으로 쓰인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조선은 유교를 이상향으로 삼은 국가였다. 유교(儒敎)의 세계에서 ‘성인(聖人)’이란 단어는 오직 한 분, 즉 공자(孔子)에게만 붙일 수 있는 단어였으니, ‘아성(亞聖)’ 즉 ‘성인(聖人)에 준하는 사람’이란 단어는 공자 다음으로 존경받는 맹자(孟子)에 대한 존칭이었던 것이다.
그다음, 이 건물을 보면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이 있는데, 정자(亭子)의 받침대 중 두 개가 연못 속에 들어가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마치 두 발을 물속에 담그고 있는 형국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淸斯濯纓(청사탁영)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濁斯濯足矣(탁사탁족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이니,
自取之也(자취지야)
모두 다 자기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
즉, 백성들이 물에 발을 씻는가, 갓끈을 씻는가는 물이 흐린가 맑은가에 달려 있듯이, 나라가 잘되는가 잘못되는가 또한 임금인 나 자신, 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신들,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는 자경(自警)의 의미가 곧 이 아름다운 정자(亭子)속에 녹아 있는 ‘전고(典故)’의 의미라 하겠다. 정조께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불러 여기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하니, 여기에 불려온 사람들은 정조임금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는 순간 엄숙한 가운데 한 번 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새해에는 이 아름답고도 의미가 깊은 부용정(芙蓉亭)을 한번 돌아보자.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하태형(河泰亨)
뉴욕주립대(빙햄턴) 경제학박사
보아스 투자자문 대표이사
수원대 금융공학대
학원장 등 역임
현재 현대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