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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산책길에서 만난 작은 행복

기사입력 2020-07-15 10:00

서초구 양재천 영동1교에서 영동2교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양재천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하천 퇴적물이 쌓여 생긴 이곳에 철학자 칸트를 테마로 한 산책길이 있다. 2017년에 조성된 공간이다. '사색의 문'으로 불리는 부식 공법 철제문을 지나 작은 목조다리를 건너면 바로 칸트의 길이 나온다.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독일 철학자의 이름이 왜 양재천 산책길에 등장한 걸까? 생뚱맞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 있는 칸트 청동상 옆에 새겨진 문구를 읽다 보면 금세 이해하게 된다. 벤치 좌우에는 칸트의 행복론이 씌어 있다.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산책로 작은 숲속 길 곳곳에 만들어진 벤치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도 있고 원형으로 만든 나무 데크에 누워 나뭇잎에 가려진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있다.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가만히 눈 감고 명상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원형 데크다.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색 깊은 철학자의 행복론이라 하기에는 너무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행복은 산 너머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작은 일상이 중요하고, 내 옆에 늘 있어주는 가족과 지인들이 소중하며, 내게 맡겨진 일과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어느덧 50대를 훌쩍 넘겨 장년층에 들어가니 걷고 산책하며 주위를 바라보는 게 좋아졌다. 운전하고 다닐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소소한 즐거움이다.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특히 마음이 복잡할 때나 머리가 어수선할 때는 운동화에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이 길 저 길 가리지 않고 걸어 다닌다. 단지 두 다리로 걷기만 했을 뿐인데 걷고 난 후 땀에 흠뻑 젖은 몸이 개운하다. 이리저리 마음 괴롭히던 잡생각들도 사라져 마음도 한결 가볍다.

칸트는 매일 산책을 하며 사색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가만히 앉아 나를 되돌아보는 일은 ‘잠시 멈춤’을 넘어 스스로를 다독이고 격려하는 힐링의 시간이다. 또 격조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서울 도심 속 양재천 한복판에 있는 작은 섬, 칸트의 산책길이 내게 소중한 이유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주춤하지만 한때 젊은이들이 일본 교토로 여행을 많이 떠났다. 그 여행 코스에 빠지지 않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은각사 옆에 위치한 철학자의 길이다.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산책하면서 사색을 즐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작은 마을을 흐르는 천 옆에는 오래된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벚꽃이 만발하는 봄에 방문하면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말 그대로 꽃비가 내리는 운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제 사색을 할 수 없다. 관광객이 길을 가득 메워 길을 걷다가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양재천 칸트의 산책길을 걸으며 문득 교토의 철학자 길이 떠오른 건 ‘본질에 충실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다시 출발했던 그 길이다. 들어갈 때는 행복에 관한 문구를 봤는데 나올 때는 다른 글이 보인다.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반드시 빛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칸트의 행복론을 새기며 걷다가 이번에는 나의 꿈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양재천의 흐르는 물을 잠깐 바라봤다. 두 아이가 물을 건너기 위해 징검다리를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다. 아이가 물에 빠질까봐 다정스레 손을 잡아주는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작은 일상의 행복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른다 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미소가 퍼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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