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食史’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북쪽의 음식’이라고 말한다. 실향민들이 그리워하는 음식이다. 한국전쟁 무렵 월남한 이들은, 당연히 고향 음식을 그리워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서울 장충동, 오장동 냉면, 전국적으로 퍼진 족발, 북한식 큼직한 왕만두가 바로 그것이다.
젊은 층들도 북한 음식에 열광한다. 부모님의 고향이 북한도 아니다. 가본 적도 없다. 한국전쟁 무렵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북한 음식’을 찾는다. 이른바 젊은 층의 핫플레이스인 서울 홍대 지역에도 ‘북한 음식 전문점’이 성행이다. 실향민들의 음식과는 또 다르다. 최근 한국으로 온 새터민들이 차린 음식점들이다. 평양냉면, 함흥냉면, 왕만두, 어복쟁반, 가리탕, 가자미식해 등 종류도 다양하다.
왜 젊은 층들도 북한 음식에 열광할까? ‘북한 음식’은 어떤 음식인가? 만두, 냉면을 중심으로 북한 음식을 알아본다.
평양냉면과 국수
왜 평양의 음식이 발달했을까? “북에는 평양이 있고, 남에는 진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북에서는 평양이 가장 번창한 도시이고, 남에서는 진주가 가장 큰 도시라는 뜻이다. 도성인 한양을 제외하면 북에서는 평양이 으뜸, 남에서는 진주가 으뜸이었다. 평양냉면이 있듯이, 진주에도 냉면이 있었다. 진주냉면이다. 냉면이 상업적으로 팔렸음은 큰 도시였고, 관청이 있었고, 시장이 있었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면 시장이 서고, 시장이 서면 밥집도 많이 생긴다. 두 도시 모두 큰 도시였고, 높은 벼슬아치가 있었고, 시장도 있었고, 왕래하며 식사를 하는 이도 많았다.
북한은 중국과 맞닿아 있다. 중국 쪽 관문은 국경 도시 의주다. 대중국 통로였다. 중국과 조선을 드나드는 중국 혹은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의주-평양-개성(해주)-한양’을 잇는 도로를 따라다녔다. 한양과 중국 북경을 잇는 길은 멀었다. 최소 3개월이 걸리는 긴 노정이다. 사신단은 늘 주방장[廚子, 주자]를 동행했다. 음식점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수백 명의 사신단 식사는 주자 몇 명이 감당했다.
주자들은 중국에 가서 새로운 음식들을 만난다. 귀국할 때는 의주-평양을 잇는 길을 따라온다. 북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평양에서 사신들은 제법 오랜 기간 머물며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평양의 관리들은 중국과 조선의 사신단 맞이가 주요 업무였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사 모시고 손님을 맞이하려면 늘 음식이 필요하다. 평양은 문물의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음식을 받아들이는 큰 도시였다.
국수와 만두, 돼지고기 등은 중국이 앞섰던 음식들이다. 이런 음식들은 중국-의주-평양을 거쳐 한반도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들어왔다.
냉면은 차가운 국수다. 국수는 중국이 발달했다. 한반도에는 밀가루가 귀했다. 중국은 밀가루가 흔했다. 우리의 주식이 쌀인 반면, 중국 북쪽은 밀가루가 주식이다. 앞선 국수 음식이 한반도로 들어온다. 국수를 가장 먼저, 널리 받아들인 곳은 평양이다. 평양에서 국수의 일종인 냉면이 발달한 이유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에 ‘경부철도’를 건설한다. 경부철도는 의주와 부산을 잇는 철도다. 북, 만주, 중국, 한반도의 물자를 빼앗다시피 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1920~30년대에 평양의 최고 생산물 중 하나는 냉면이다. 건면 냉면 공장이 있었고 이미 평양냉면은 유명했다. 일본은 중국에서 대량 생산되는 각종 곡물과 한반도의 곡물을 이용해 냉면을 만들고, 이를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1930년대에는 냉면집을 중심으로 ‘동맹파업’도 일어났다. 1938년 12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평양의 냉면집 파업’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양면업노동조합(平壤麵業勞動組合)’의 피고용인 240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는 내용이다. 요구 조건은 역시 임금 인상이다. 11월 18일, 이들이 현행 임금 90전을 1원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주인들은 12월 1일 자로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날짜를 12월 10일로 연기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행한 것이다. 결국, 민간의 마찰에 경찰이 개입한다.
평양에서만 냉면이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에도 냉면집이 많았다. 파업도 있었다. ‘평양냉면 파업 사건’ 이전인 1931년 6월 1일 자 신문기사다. 제목은 ‘평안냉면옥 배달부맹파(平安冷麪屋 配達夫盟罷)’다. 평안옥이라는 냉면집 배달부들이 동맹파업을 했다는 뜻이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평안옥’은 경성의 중심지인 서린동 89번지에 있는 냉면 전문점이다. 이곳에는 종업원 10명이 있었다. 모두 배달부다. 일급은 1원. 문제는 기사가 실리기 전인 5월 29일, 주인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90전으로 낮췄다. 다음 날엔 직원 3명을 해고했다. 배달부들은 일하지 않겠다고 동맹파업으로 맞선다. 경성 한가운데인 서린동의 냉면집 이름이 ‘평안옥’이다. 결국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유행한다. 경성을 비롯해 각 지방에도 냉면이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평양냉면이 널리 퍼진다.
긴 세월 동안 중국-평양-서울을 잇는 길을 따라 음식은 전해졌다. 중국 국수 문화가 평양에 전해지고, 평양의 냉면이 서울을 비롯해 전국으로 퍼졌다.
만두와 상화
만두는 냉면보다 더 복잡하게, 여러 차례 한반도로 건너온다. 처음은 고려시대 말기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만두는 몽골 침략 때 한반도로 처음 건너온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 초기 기록에는 만두가 없으나,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쌍화점’의 쌍화(雙花), 상화(霜花)는 만두다(쌍화점이 만두 전문점이 아니라 액세서리 파는 곳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궁중에서 만두를 훔쳐먹었다가 사형당한 도둑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려·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만두는 만두 혹은 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나타난다. 조선시대 말기, 임오군란과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중국 군인, 민간인, 상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온다. 이때 짜장면, 짬뽕과 더불어 만두를 한반도에 전한다. 지금도 인천 차이나타운, 금강 유역의 군산, 익산 등에는 화상노포가 많다. 이들은 여전히 ‘청요리’와 더불어 짜장면, 만두 등을 내놓고 있다.
조선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은 중국이다. 외교적으로도 사대의 나라였다. 조선은 1년에 최소한 4차례 중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중국과 조선을 오갔다. 중국 측 사신도 빈번히 한반도를 오갔다. 사람을 따라 음식도 전해진다.
우리는 중국에는 없는 만두전골, 만둣국도 만들었다. 만두가 한식이 된 것이다. 평양, 의주는 중국으로부터 만두를 받아들여 한반도 전역으로 퍼뜨렸다. 서울에서도 만둣국을, 남쪽에서도 교자를 흔하게 먹는다. 조선시대 말기,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들어온 화상들도 만두를 전했다. 북쪽의 큰 만두, 왕만두는 한반도로 들어온 중국 만두와 비교적 닮았다. 남쪽으로 넘어오면서 만두는 작아진다. 개성만두도 있고 서울식 만두도 있다. 한반도는 음식의 용광로다. 모든 음식을 받아들인 다음 변형, 변화, 발전시킨다. 중국 음식, 북한 음식은 서울로 오면서 또 달라진다.
오늘날 서울의 북한 음식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중국에서 받아들인 다음, 한반도 식으로 바꾼 것이 다시 서울로 전해진다. 실향민들이 전하고, 새터민들이 또 전한다. 북한 음식이라고 부르지만, 시대별로 음식은 달라진다. 자신들이 떠났던 순간의 ‘북한’ 음식이다. 실향민들의 북한 음식과 새터민들의 북한 음식이 다른 이유다.
만두와 냉면은 우리 것이지만 우리의 전통음식은 아니다. 외국에서 들여온 다음, 변형·발전시켜 우리 음식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북한 지역 사이에도 여러 차례 교류가 있었다. 이런 교류로 만두, 냉면은 발전해 한식이 된다. 북한 음식도 마찬가지. 한국전쟁과 그 이후 여러 차례 한국으로 건너온다. 한국에 온 음식들은 조금씩 변화, 발전하다 어느 순간에는 서울식, 한국식, 한식이 될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북한 음식에 대해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다. 존재하는 나라, 뉴스 등에서 자주 보는 나라, 그러나 갈 수는 없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다. 유럽과 미국, 일본 음식에 대한 호기심보다 더 강하다. 쉽게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