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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가치, 품위,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열화당책박물관’

기사입력 2020-04-20 10:33

▲2층에서 내려다본 제1전시실 모습(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2층에서 내려다본 제1전시실 모습(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온갖 꽃과 새들의 향연으로 시끌시끌한 봄이지만, 이전처럼 편하게 야외활동을 할 수가 없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한 때다. 오랜 시간의 칩거로 다소 지칠 때, 사람이 많지 않은 곳으로 훌쩍 당일 여행을 다녀와도 좋겠다. 도시 전체가 분홍, 보라,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파주출판도시는 어떨까.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제1전시장 2층 라운지(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제1전시장 2층 라운지(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여기에 자리한 '열화당책박물관'은 출판사 열화당(悅話堂)이 운영하는 곳으로 동서양의 희귀 고서들과 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예술 서적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글과 그림, 책의 가치를 가장 품격 있게 보존하고 있는 공간으로 손꼽힌다.

열화당은 이기웅 대표의 고향집인 강원도 강릉 선교장(江陵船橋莊)의 사랑채 이름에서 따왔다. 기쁠 열(悅), 말씀 화(話),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어진 지 200년이 넘은 선교장의 열화당은 예로부터 문인, 학자들이 모여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를 논하고 진리를 모색하던 학문의 사랑방이었다. 열화당은 이 고택의 정신을 이어받고,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출판사 이름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책들의 풍경을 보여주는 열화당책박물관 제1전시실 내부(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아름다운 책들의 풍경을 보여주는 열화당책박물관 제1전시실 내부(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1971년에 조선 후기의 천주교 박해에 관한 기록을 모은 ‘벽위편(闢衛編)’을 복각하여 첫 출판물로 선보인 열화당은 미술 전문 출판사로 토대를 다졌다. 이후 한국의 전통 문화와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해외의 유명 사진가, 건축가, 문학을 조명하는 등 출판의 지평을 넓혀왔다.

▲제2전시실 책장에 보관중인 괴테 전집과 루터 전집(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제2전시실 책장에 보관중인 괴테 전집과 루터 전집(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열화당책박물관에는 동서고금의 책 4만여 권이 소장돼 있다. 건물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책들의 풍경을 보면 누구나 감탄을 하게 된다. 1층과 2층이 탁 트인 내부 벽면을 따라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고, 앞쪽 진열대에도 온갖 책들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예술 분야의 도서를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열화당이 출간한 책들을 주제별로 살펴볼 수 있다. 한쪽 코너에는 작은 제단처럼 꾸민 ‘기억의 공간’이 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들로, 열화당에서 출간된 책의 주요 저자와 위인들 사진을 전시했다. 사람과의 인연을 기억하려는 이 대표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제1전시실의 한글 운동사 관련 서적들(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제1전시실의 한글 운동사 관련 서적들(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제1전시실을 지나 제2전시실로 들어서면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는 각종 고서들을 만날 수 있다. 자물쇠가 채워진 책장 안에는 문고판 사이즈의 괴테 전집 60권과 백과사전 크기의 마르틴 루터 전집 12권 등 동서양의 희귀 도서들이 보관돼 있다. 중앙 진열대에는 한글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조선 시대의 고서와 영인본들이 자리 잡고 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그 제자(製字) 원리를 한문으로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 ‘용비어천가’, ‘천자문’, ‘토정비결’부터, 한글 가사 악보집과 시조집, 여성들과 소통하려 한 선비들의 편지글 등이 있다.

▲고서들을 보관중인 제2전시실 모습(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고서들을 보관중인 제2전시실 모습(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이곳 박물관에서는 매년 기획전시와 특별전시가 개최되는데, 지금은 ‘한글과 책’ 전을 진행 중이다. 이 전시는 한글의 역사를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게 꾸민 것으로, 우리말로 새긴 우리네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고서부터 최신의 한글 연구서까지 총 450여 종의 문헌을 볼 수 있다.

제1전시실에는 개화기, 일제강점기, 육이오전쟁, 경제 발전기, 민주화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도서들이 전시돼 있다. 최초의 우리말 띄어쓰기가 구사된 ‘독립신문’ 영인본도 있고, 일제강점기에 판금 되었으나 해방 후 다시 나온 위인전과 역사책들, 최초의 여성잡지도 만날 수 있다. ‘6·25전쟁 직후 한글 소설’ 코너에 있는 육전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설들도 흥미롭다.

▲제2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 간행된 고서들(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제2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 간행된 고서들(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조선 시대까지는 한글을 독립된 형태보다는 편지글이나 노래 가사로 활용하다가 외국 사상이 들어오면서 대변화가 일어나요. 정조시대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 선생이 한글교리서 ‘주교요지’ 필사본을 만들어 천주교의 전파가 빨랐어요. 기독교와 가톨릭 관련 서적들이 한글발전에 아주 큰 역할을 하죠. 순 한글로 된 필사본을 선교사들이 일본에 가지고 가서 납 활자로 찍어왔어요. 한글은 양반이 아닌 평민들과 여성들이 사회운동과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줬죠.”

▲개화기 한글 기독교 서적과 한글신문(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개화기 한글 기독교 서적과 한글신문(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책과 출판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내공으로 방문자들에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혜경 학예사의 설명이다. 이 전시를 통해 한글과 책이 함께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이 시대에 맞는 한글의 가치와 미래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올해 5월 22일까지로 예정된 이번 전시는 현재 코로나19로 잠시 관람을 제한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정 학예사의 해설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다음번 전시로는 ‘대한민국 국토와 자연’전을 진행할 예정이다.

▲열화당책박물관 한켠에 마련된 '기억의 공간'(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열화당책박물관 한켠에 마련된 '기억의 공간'(사진 정미경 시니어기자)

만들기 까다롭지만 가치 있는 책들, 완벽할 순 없지만 단단하고 부끄럽지 않은 도서목록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열화당. ‘우리 시대를 담아내고 이끌어 가는 책’이어야 한다는 소망과, ‘한국문화의 미래를 떠받치는 책’이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글과 그림의 정갈한 상차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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