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유종순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40년 만에 편지라는 것을 써봅니다. 젊은 시절 교도소에서 부모님께 올렸던 불효자의 안부편지 외에는 여태껏 편지라곤 써본 적이 없습니다. 고민 끝에 오늘 그대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40년 전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부모님이었다면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편지는 깊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대에게,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그대에게 아마 배달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대에게 위로와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쓰겠습니다. 동가숙 서가식하던 가난한 운동권 시인을 지아비로 삼아 수십 년 동안 사랑과 헌신으로 보듬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아픈 몸, 아픈 마음 잘 추스르면서 여기까지 잘 견뎌왔다고 말입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그대가 손놓아버린 집안일,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핑계 삼아 아픈 그대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넨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나는 약에 취해 깊이 잠든 그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떠올립니다. 그대가 마치 마녀가 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잠이 든 공주처럼 느껴집니다. 동화 속 공주는 백마 탄 왕자의 입맞춤에 깨어났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대를 잠 속에서 구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백마 탄 왕자를 흉내 내며 입맞춤 대신 그대가 좋아하는 ‘체 게바라 평전’이나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몇 구절을 읽어주거나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이상국 선생의 시 ‘혜화역 4번 출구’를 읊어주곤 합니다. 훌훌 털고 어서 빨리 일어나라고요. 그러나 깊은 잠에 빠진 공주는 왕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깨어나지 못합니다. 동화는 동화이고 현실은 현실인가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가 만나 서로 사랑한 날들과 우리가 함께 세상을 향해 걸어갔던 날들을 추억하곤 합니다.
그대와 나는 추운 겨울 삼전동 반지하 자취방을 선점한 처제를 피해 골목에 주차된 남의 봉고에 들어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면서 밤을 지새웠지요. 경기도 수동이었던가요, 단체수련회 때는 새벽에 몰래 둘이 빠져나와 뜨거운 입맞춤을 하기도 했고요. 또 최루탄 가스 뒤덮인 저 80년대의 광화문과 종로 거리를 우리는 손을 잡고 백골단을 피해 내달리기도 했지요. 그리고 우리의 두 아이를 얻은 그날, 정말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그 감동은 절대로 잊을 수 없어요. 추억하다 보면 고마운 사람은 지금 아픈 그대를 돌보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고 보듬어준 바로 그대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대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참으로 그대에게 감사드려요.
그대와 함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가꾸어야 할 삶에 대한 꿈을 꾸던 그 시절로 말입니다. 돌아보니 그대와 나 참 많이 변했습니다. 나는 세상과의 투쟁을 피해 이리 숨고 저리 피하면서 사는 동안 어느덧 경멸스러운 꼰대가 되어버렸고, 그대는 게으른 병자가 되어 자기 안에 갇힌 채 세상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초심을 잃은 것이지요. 내가 잠든 그대에게 체 게바라와 조나단 리빙스턴을 읽어주는 것은 다시 좋은 꿈 꾸자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대, 기억하나요?
우리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꿈과 이상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기억하나요. 꿈을 꾸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었는지 기억하나요. 그래요. 꿈은 우리를 희망으로 이끄는 힘이었지요.
꿈이 있기에 사람들은 어제의 절망과 고단을 이겨내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 전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꿈만으로는 희망을 이룰 수 없어요. 좋은 꿈에 걸맞은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있을 때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꿈과 희망을 이루려면 정말로 간절한 염원과 함께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꿈과 희망을 꿋꿋하게 사랑해야만 해요. 그래야 열악하고 왜소한 현실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지켜낼 수 있어요.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요, 그대.
나는 항상 그대 옆에 있을 테니, 어서 일어나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꿈은 다시 꿀 수 있어요.
유종순 시인
시인, 문화평론가. 1987년 무크지 ‘문학과 역사’, 1988년 ‘창작과 비평’ 복간호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평화통일위원장, 이사, 인터넷저널 대표이사 등 역임. 마로니에시낭송회 회장. 시집 ‘고척동의 밤’, 저항음악평론집 ‘노래, 세상을 바꾸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