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지난 삶을 자주 돌아본다. 인생에서 모든 순간마다 어떤 선택으로 방향이 정해졌을 텐데 그때 과연 옳은 선택을 했었던 가는 알 수 없다. 그저 성공과 실패가 교직 되면서 여기까지 흘러와 현재의 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또한 그러한 직조 과정이 아직 진행 중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도 선택이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최종적인 삶의 무늬가 어떠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어쩌면 인생이란 선택의 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인생에서의 선택의 의미에 대해 처음으로 일깨워준 것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였던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선택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 같지도 않다. 진학이나 전공 선택, 결혼, 집 장만과 같은 대부분의 중요한 선택들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큰 마찰 없이 결정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비슷한 연배들 모임에 자주 가게 된다. 자기 자랑으로 가득하다. 부자임을 드러내고, 자식들을 자랑하고, 이미 지나간 경력만을 하염없이 되뇐다.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안도하는지, 아니면 옳았다고 애써 말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행복한지에 대한 확신은 옆에서 봐도 읽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선 공동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없으니 대화는 황폐해지고 자리는 무료해질 뿐이다.
사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시대를 살았다. 먹고 사는 문제로 여념이 없었으니 그 시절 선택이라는 행위는 사치로 보일 정도였다. 물자는 늘 부족했고 그저 얻어걸리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도 ‘가난을 벗어나자’라는 일념으로 단순하기 그지없이 단일대오로 행진하였다. 따라서 그 시절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집단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고 사회적 가치도 획일화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런 환경이 선택을 쉽게 하며 선택에 관해 고민 없이 살게 했는지 모른다.
만일 행복이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오늘날처럼 행복한 시대도 없을 듯하다. 20세기 경제성장의 결실로 우리 주변엔 온갖 물건과 서비스가 넘쳐난다. 물자 부족 시대가 소품종 대량생산이었다면 21세기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붙든다. IT의 발달로 모든 선택을 불편 없이 손안에서 해결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히려 너무 선택지가 많아 결정하기 어려운 역설에 빠질 정도다. 그러나 선택의 풍요가 삶의 행복지수를 그다지 상승시킨 것 같지는 않다.
바스 카스트의 책 ‘선택의 조건’은 선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예컨대 누구를 사귈 것인가 하는 선택에 있어서 연애하면 할수록, 상대를 바꾸면 바꿀수록 만족도는 더 낮아진다고 한다. 더 나은 상대가 나타날 것 같은 기대가 행복지수를 지속해서 떨어뜨린다는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선택지가 전혀 없을 때 대상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낸다고 한다. 말하자면 당장 이혼할 수 없으니 배우자에게서 장점과 고마움을 찾아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한때 뷔페식당이 유행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시들해지고 싸구려 점심 전문 식당으로 전락했다. 요즘은 한 가지를 해도 특유의 맛과 가치를 주는 전문 식당이 주목받고 있다. 과거 우리의 선택들이 초라해 보여도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면 훌륭한 선택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가지 못한 길은 그저 ‘가지 않은 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