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1986년 3월 30일, 서른 살의 나이에 저는 일곱 형제의 맏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장남의 숙명처럼 시부모님을 모셔야 했고, 주변의 염려는 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당시 저는 젊음의 패기인지 알 수 없는 용기인지 모를 힘에 ‘나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외쳤지만, 현실은 모진 바람처럼 매서웠습니다.
시어머님은 완벽한 며느리를 기대하셨습니다. 음식 솜씨부터 집안일까지, 빈틈없는 살림꾼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사회생활이 전부였던 저는 서툰 손길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일곱 자녀를 키우시며 온갖 풍파를 겪으신 시어머니의 날카로운 질책에 눈물짓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꿋꿋이 어머니의 그림자처럼 부엌을 맴돌며 살림의 지혜를 배우고 익혔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어머니의 손맛을 고스란히 닮은 김치를 담글 수 있게 되었고, 묵직한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는 붉은 고추장과 깊은 맛의 된장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모진 시집살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숙성되어가는 장맛처럼 깊고 묵직한 ‘시간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을 품어야 비로소 제맛을 내는 장처럼, 사람 또한 수많은 시간의 흔적 속에서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황가람, ‘나는 반딧불이’ 中
황가람 가수의 ‘나는 반딧불이’는 어둠 속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던 제게 작은 위로의 속삭임이었습니다. 노래를 들을 때면, 눈물로 얼룩진 시집살이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고된 시간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맑은 눈망울과 해맑은 웃음소리를 지닌 세 딸 덕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오는 상장들은 지친 어깨를 다독여주는 따뜻한 격려였고, 바르게 자라나는 딸들의 모습을 보며 고된 현실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성장하고, 주부 9단의 노련함이 몸에 밴 저의 삶이 비로소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을 찾아갈 무렵,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시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시어머니께서 팔순이 되면서 서서히 기억의 조각들을 잃어가는 치매 증상을 보이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녀 같은 미소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꽃을 피우시며 활기 넘치던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낯선 단어 앞에서 머뭇거리셨고 말수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아이들도 다 크고 나도 이제 자랑스러운 며느리가 되었구나, 어머니께 인정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어린아이 같이 작아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고 속상했습니다. 그러나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24시간 보살펴야 하는 현실은 그 이상의 무게로 저를 짓눌렀습니다.
다행히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급격히 악화되기 전에 주간보호센터를 다니시면서, 잠시나마 숨 쉴 틈이 생겼습니다. 센터에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시는 어머니는 이전의 활기를 되찾으시는 듯했습니다.
구성진 가락으로 동네잔치를 흥겹게 만들었던 ‘가수’ 어머니의 밝아진 모습은 저에게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짧았던 행복의 시간은 슬픔 앞에서 덧없이 사라졌습니다.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별세 후, 어머니는 슬픔과 함께 찾아온 고관절 골절로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셔야 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흘러갈수록 어머니의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습니다. 숟가락 들 힘조차 없으셨던 어머니는 오직 미음이나 단백질 음료로 겨우 생명을 이어가셨고, 스스로 대소변조차 가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앙상하게 마른 몸은 욕창으로 신음했고,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머니를 간호하는 시간 속에서, 저는 점차 세상과 단절된 채 집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갇혀갔습니다.
남편과 세 딸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직장 또는 학교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어머니의 간병은 오롯이 저의 몫이었습니다. 혹시나 어머니에게 위급한 상황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융통성 없던 저는 집 앞 슈퍼마저 제대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대소변으로 얼룩진 수건과 이불을 빨래하며, 홀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머니께 힘없이 밥을 떠드리며 저도 모르게 울먹인 적도 있습니다. “어머니, 저한테 왜 그렇게, 지금까지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시나요?” 그 순간 어머니께서는 무언가 느끼셨는지 미안한 얼굴을 지으셨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 저를 힘들게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잔소리와 핀잔 속에서도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딸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시절, 어머니는 딸들의 얼굴을 곱게 씻겨주시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주셨습니다. 늘 가꾸는 것을 즐기셨던 어머니는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저와 딸들에게 예쁜 옷을 선물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치매가 깊어지기 전, 어머니는 당신이 소중하게 모아오신 180만 원을 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오랜 쌈짓돈이었고,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했다는 따뜻한 위로처럼 느껴져,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치매를 앓으신 후에도 돈을 모으시던 습관은 여전하셨는지, 그 뒤로는 휴지를 돈처럼 소중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볼 때마다 180만 원의 묵직한 사랑이 느껴져, 가슴 먹먹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미워하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어머니를 향한 저의 마음은 그렇게 복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망의 순간에도 저는 책임감으로 돌봄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과 헌신으로 어머니의 곁을 지켰습니다. 이후 우연히 정호승 시인의 시 ‘낙과’를 읽었을 때, 땅에 떨어진 과일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책임을 다하려 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깊은 슬픔과 함께 진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기나긴 병마와의 싸움 끝에 2016년 12월 11일, 어머니는 편안한 얼굴로 영원한 안식에 드셨습니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는 힘겹게 눈을 뜨시더니 저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희미한 목소리로 무언가 말씀을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따뜻하고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부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히 돌아가세요.” 오랜 시간 동안 저를 짓눌렀던 어머니에 대한 모든 서운함과 아쉬움을 깨끗이 용서하며, 어머니의 영면을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맞이한 60대는 저에게 또 다른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건강만큼은 자신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지는 코피에 놀라 찾은 병원에서 고혈압 진단을 받았습니다.
젊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건강에 붉은 신호등이 켜진 것입니다. 지금은 꾸준한 관리 덕분에 많이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여러 종류의 약을 챙겨 먹으며 건강관리에 힘쓰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던 무렵, 늘 헌신적인 사랑으로 저를 지켜주셨던 친정어머니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동안은 헤어날 수 없는 슬픔의 늪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내고 나니, 문득 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텅 빈 집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은 끝없이 무료했고,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제 남은 나의 시간은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까?’라는 묵직한 질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슴 한켠에 고이 간직해왔던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그림 그리기를 가장 좋아했고, 미술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순수한 아이였습니다. 엉성한 솜씨로 그린 제 그림을 보시고 친정아버지께서는 ‘미술을 전공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의 장녀였던 저에게 미대 진학은 꿈꿀 수조차 없는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아쉽게 접어야 했던 미술가의 꿈은 훗날 자랑스러운 첫째 딸이 대신 이루어주었습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저는 용기를 내어 지역 문화센터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세상으로 나아가는 떨리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여성회관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붓과 함께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주민센터에서 맑고 투명한 어반스케치의 매력에 푹 빠져 그림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왜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그림을 그리는 매 순간이 행복하고, 캔버스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몰두하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제 안에 이렇게 뜨거운 그림을 향한 열정이 숨겨져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붓끝에서 섬세하게 피어나는 색의 향연 속에서, 저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기쁨과 깊은 치유를 경험합니다.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다채로운 색감과 붓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동안, 세상의 모든 시름은 잠시 잊고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는 행복을 느낍니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간도 됩니다.
지난해 가을 여성회관에서 수업을 받을 당시 회원들과 함께 지역 문화 행사에서 전시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비록 제 작품은 작은 부분이었지만, 제 이름으로 걸린 작품을 보았을 때의 뿌듯함과 벅찬 감동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작게라도 나의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제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따뜻한 감정을 나누고 깊이 있는 소통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림을 배우면서 잃어버렸던 삶의 활력을 되찾았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소중한 친구들을 얻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큰 기쁨입니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묵묵히 살아온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는 시간은 메마른 저의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줍니다.
살면서 처음 가본 수락산공원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고, 젊은 친구들과 함께 최신 가요인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이’나 로제의 ‘아파트’를 듣고 이야기 나누는 소소한 즐거움은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어느덧 그림을 시작한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사계절의 변화를 두 눈에 담고, 제 손으로 직접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일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모진 눈물과 가슴 시린 사랑, 묵묵한 책임감과 끈기 있는 인내. 그 모든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지금의 제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한때는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초라한 개똥벌레라고 생각했던 어두운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제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작지만 소중한 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도 제 삶의 빛나는 순간들을 캔버스 위에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채워나가고 싶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빛나는, 진짜 빛나는 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