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뿌리 '전주'를 떠나다
전주(全州)는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와 조상들이 태어나고 자란 조선왕실의 뿌리라 할 수 있는데, 대대로 살아오던 이곳에서 이성계의 4대 조상 이안사에 이르러 전주를 떠나게 된다.
훗날 이성계에 의하여 목조대왕으로 추존된 이안사는 시조 이한의 18세가 되며 전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지금의 이목대(梨木臺)가 그곳인데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이른다.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現 校洞)이 있었는데, 이 자만동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전주시 교동, 한옥마을 위쪽에는 이안사가 살던 곳 이목대(梨木臺)와 이성계가 남원 운봉까지 내려와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개선하던 길에 잠시 들러 잔치를 베풀었다는 오목대(梧木臺)가 남아 있다(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
시조 이한부터 누대에 걸쳐 이곳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조상들은 4대조 이안사에 이르러 전주를 떠나게 되는데 1230년경, 27세쯤이던 그가 전주의 고급 관리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는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대왕께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이를 관의 명을 거절했다 하여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군사를 보내 굴복시키려 살해위협이 예상되는바 화를 면하기 위하여 부모와 일족을 이끌고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를 따른 혈족과 외족이 170여 호나 되었다고 한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자료).
왕조 창건의 태몽,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
이안사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온 지 1년 후 부친상을 당한다. 마땅한 묏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한 도승으로부터 소 백 마리(百牛)를 잡아 제사 지내고 금관(金棺)에 안장해 장례를 치르면 5대손 안에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형편이 그렇지 못한 이안사는 하얀 소(白牛)를 구하여 ‘百牛’를 ‘白牛’로 해석하고 들에 널린 귀리 짚으로 관을 감싸니 금빛이 도는 금관이 되어 도승의 말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안사는 아버지 양무장군의 묏자리를 잘 써서 5대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이 되었으며, 이성계는 4대 조상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여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칭하였으니 이곳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活耆里)는 황제가 나왔다는 황터, 곧 황기(皇基)라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수호군(守護軍)을 두고 관리하였으며 삼척을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현(縣)에서 부(府)로 승격시켰다. 고종 때(1899) 이르러 묘호를 준경(濬慶)으로 공식 추봉하고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준경묘는 큰길에서 40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금강송 군락지를 통과하는 길이다. 특히 이곳에는 전국에서 가장 멋진 소나무로 뽑힌 미인송(美人松)이 있는데 2001년 충북 보은 속리산에 있는 정이품송과 혼례를 치르고 후손을 받아 키우는 그 나무이다.
이렇게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 온 이안사는 부모를 모두 삼척에 묻었는데 부친 양무 장군의 묏자리가 군왕이 나온다는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조선왕조의 탄생을 예약 한 곳이다.
당시 해안지역은 이곳 강원도까지도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였으며 몽고군이 일곱 차례나 전국을 초토화시키며 휘젓고 다닐 때다. 이에 이안사는 대규모 족단(族團)을 이끌며 외적에 항전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으나 전주에서 충돌했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해 옴으로써 수년 만에 다시 짐을 꾸려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