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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사이다 맛 동치미

기사입력 2018-03-08 15:03

▲사부인이 보내주신 동치미(박혜경 동년기자)
▲사부인이 보내주신 동치미(박혜경 동년기자)
추운 겨울 아침 며느리가 전화했다. 친정엄마가 동치미를 보내셨는데 어머님께도 갖다 드리라며 한 통을 더 주셨다 한다. 말만 들어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사부인의 김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어서 맛보게 될 동치미에 벌써부터 입맛이 다셔졌다.

사돈댁이 사는 곳은 충청도인데 마당에서 익힌 동치미라 했다. 며느리가 들고 온 동치미에는 탱글탱글한 무가 알차게 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국자 떠 국물을 마셔보았다. 달콤 시원하며 쨍한 맛이 났다. 이 맛은 예전 정릉의 마당 넓은 집에 살던 때를 떠오르게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정릉의 집은 파란 잔디가 깔린 마당이 꽤 넓었다. 잔디밭 주위로는 해마다 새빨간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곤 했다. 한쪽으론 커다란 라일락나무가 있어 향기에 취했고 안방 창문 앞 등나무엔 은방울처럼 예쁜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보기에 좋았다.

마당이 넓었던 정릉 집은 꽃이 필 때도 아름다웠지만, 눈 내리는 한겨울 풍경도 못지않게 좋았다.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마당 한쪽에 구덩이를 파고 서너 개의 큰 장독을 묻던 일도 즐거운 추억 중 하나다. 한겨울이면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집에 찾아오신 소사 아저씨와 함께 커다란 장독을 땅에 묻었다. 장독을 묻은 후엔 솜씨 좋은 소사 아저씨가 지푸라기를 꼬아 멋진 장독 덮개를 만들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소사 아저씨는 잔디밭 주변의 장미나무에도 겨울옷을 입혔다. 칭칭 새끼줄로 꼰 짚옷을 두른 장미나무는 이듬해까지 따뜻하게 겨울을 견뎠다.

예전에는 김장을 하면 한 접 두 접씩 했다. 한 접이 배추 100포기이니 4등분 한 배추 400개가 산처럼 쌓였다. 요즘에는 4~5포기 정도만 하지만 그땐 다들 찬거리가 부족할 때라 겨울 반양식으로 김장을 했다. 물론 딸들도 돕기는 했지만 대부분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왁자지껄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김장을 도와주셨다.

엄마는 김장보다 아주머니들께 대접할 음식 준비로 바쁘셨다. 따끈한 쇠고기뭇국과 김칫소와 함께 먹을 돼지고기를 삶아냈다. 뽀얗게 김이 서린 주방에서 아주머니들의 수다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어울려 먹던 밥상은 늘 즐겁고 풍성했다. 그렇게 배추김치와 동치미가 땅에 묻은 장독으로 차곡차곡 들어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게 익었다.

어느 눈 내린 추운 겨울날, 바가지를 들고 나가 짚 덮개를 벗기고 장독 뚜껑을 열어 떠낸, 살얼음이 사르르 뜬 동치미는 쨍한 사이다 맛이 났다. 어쩌면 그렇게 달고 시원한지… 땅속에서 서서히 익힌 게 아니면 어떤 김치도 그런 맛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마당 넓은 집에서 사는 동안은 매년 겨울 맛있는 김치와 동치미 맛을 볼 수 있었지만, 부모님이 살기 편한 아파트로 이사하신 후부터는 한 번도 그 맛을 본 적이 없어 아쉽다.

오늘 며느리의 친정에서 보내온 동치미가 옛 맛을 떠오르게 했다. 아삭한 무와 국물을 맛보며 옛 추억을 떠올려봤다. 사부인께 감사 전화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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