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조용한 여행이나 고요한 곳을 찾고 싶어진다. 요사이 조심스럽게 시도하는 것이 있다. ‘혼자 여행하며 얼마나 외로운지 반대로 얼마나 자유로운지 체험해보자’는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선망에도 불구하고 시도는 정말 쉽지 않다. 천성이 게을러서 일수도 있고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남들은 아무도 내게 관심 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래서 연습할 겸해서 모르는 사람 사이에 끼어 강화도를 택했다. 외세에 항쟁으로 대적한 곳으로 마치 내가 지금 두려움과 싸우듯 그곳을 택했다.
이전에도 2번정도 강화도에 갔었으나 운전할 때는 내비게이션에 길을 맡기고 가느라 지리를 모르겠고, 얻어 타고 갈 때도 얘기하느라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엔 완전 자유로운 몸과 정신으로 떠나면 다르리라 기대한다.
관광안내소 지도를 따라,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도착하니 바로 초지진 앞이었다.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요새인데 진에는 배 3척과 군관 11명 사병 98명과 돈군 18명이 배속되고 돈대 세 군데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돈대는 지금의 초소와 같이 감시와 공격을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진 아래 돈대가 있는 것이다
이곳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의 격전지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파견한 운요호의 침공은 고종 13년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했다.
초지진의 이끼 낀 성벽을 따라 걷고, 폭격을 몸으로 막아낸 노송의 상처를 눈으로 어루만지며 광성보로 향한다. 보 아래 진이 있고 진 아래 돈대가 있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이때 구식 무기를 갖고 최신 무기와 대적하느라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광성보에는 흰옷의 시신, 조선백성들이 거리에 뒹구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10명의 병사가 전사했으나 우리 군은 전원이 몰살할 정도로 포로가 되느니 죽기로 항쟁했고 그래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 전원이 순국하였다. 51인의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신미순의총’이라 하고 어 장군 형제의 ‘쌍총비각’을 세워 충절을 기리고 있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대가 약탈했다가 2007년 대여 형식으로 반환한 어재연 장군의 수帥 자기 및 각종 무기류가 전시된 강화 전쟁박물관에서 무기와 갑옷을 보며 속이 불편했다.
열악하고 부족한 상황에서 오직 몸으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방법 외에 무엇이 있었을까. 도망치지 않고 숨지 않고 비굴해지지도 않고 용감하게 싸운 그들이 애처로웠다.
이런 비극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똑똑한 지도자를 보내주기를 지금의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싶다.
강화도의 치열했던 전투 현장에 서니 통치자를 잘 못 만나 고통스럽게 죽어야 했던 백성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조용한 여행은 사람을 사색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행동이 자유롭다기 보다 마음이 자유롭다. 그래서 역사를 되짚어 보게 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