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방심하면 몸은 참아주지 않아요”
다른 큰 사고들과 마찬가지로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은행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이경호(李京浩·48)씨는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그래머다. 업무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업무의 특성상 여러 대의 컴퓨터를 다뤄야 하는 그의 주변은 당연히 복잡한 케이블이 얽혀 있었다. 임시로 가설해놓은 전선이 문제였다. 바퀴가 달린 의자로 몸을 모두 움직여 좌우의 다른 컴퓨터를 조작해야 했지만 케이블이 걸리적거리면서 손과 목만 움직여 다루는 습관이 생겼다. 말 그대로 사소한 것이었다. 별것 아니라 여겼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몸에 피로를 쌓았고,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어느 순간 활을 밀어내듯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느 날 자리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는데 갑작스럽게 목이 아프더라고요. 마치 담 걸린 것처럼. 별것 아니라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았어요. 나중엔 두통까지 와서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더라고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어요.”
이씨의 근무환경은 영화 속 펀드매니저를 상상하면 된다. 4대의 모니터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각각의 모니터는 별개의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상태. 이메일 등 일반 용도의 컴퓨터와 프로그램 개발용, 서버관리용 컴퓨터 등은 철저히 분리되어 관리된다. 수많은 고객의 예금이 관리되는 만큼 사소한 보안의 허점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목과 상체만 돌려 이런저런 업무를 오래 보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탈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허리 때문에 이미 고생해본 적이 있어, 운동을 꾸준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일 있겠나 싶었죠. 그게 오만이었나봐요.”
파스 몇 장으로 낫지 않는 병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이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 병을 해결해 줄 사람을 마음속으로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오랜 시간 그들을 이어준 라뽀
세연통증클리닉의 최봉춘(崔鳳春·58) 원장과 이경호씨의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려 20년의 시간이다. 1997년 이씨는 허리가 아파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다 최봉춘 원장 덕분에 겨우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고, 관리를 위해 계속 인연을 유지했다. 최 원장은 이씨와는 이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의사와 환자 사이로 만난 시간이 워낙 오래되었으니까요. 지금 자리가 아닌 초창기 개원 시절부터 환자로 저를 찾아주었어요. 누구보다도 몸 상태를 잘 알고, 함께 늙어가는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고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통증클리닉이라는 병원명이 좀 생소해 보이기도 한다. 통증클리닉은 어떤 곳일까. 최 원장은 “말 그대로 통증의 원인을 찾아 환자를 안 아프게 해주는 것이 목적인 곳”이라고 설명한다.
“통증의 원인은 다양해요. 근골격계 통증일 수도 있고, 신경 통증일 수도 있어요. 환자의 환부를 진찰해 통증의 원인과 치료 방법을 찾습니다. 정형외과와 다른 부분은 외과적 치료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씨의 증상은 전형적인 목디스크로 치료가 그리 어려운 경우는 아니라고 했다. 목디스크는 왜 생기는 것일까.
“척추의 뼈와 뼈 사이에는 추간판, 그러니까 흔히 디스크라고 부르는 것이 쿠션 역할을 해줘요. 목뼈에 걸리는 무게를 분산시켜주는 거죠. 그런데 간혹 이 디스크가 삐져나와 목의 신경을 누를 때가 있어요. 디스크가 삐져나오는 경우는 매우 흔한데, 그중 일부가 통증을 유발합니다. 디스크가 삐져나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통증이 있지는 않아요. 대부분의 디스크 질환은 퇴행성입니다. 허리디스크도 마찬가지고요. 노화 과정에서 디스크에 변형이 오는 거죠.”
최 원장은 최근 목디스크 환자의 증가를 의료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달라진 생활환경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과거엔 책과 서류 볼 때를 제외하면 앞을 보면서 생활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주위를 보세요.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심지어 걸을 때도 말이죠. 이러다 보니 당연히 목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죠. 또 잘못된 자세도 큰 원인 중 하나예요. 평소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디스크 수술, 이럴 때만 해야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디스크, 수술 해야 하나? “대부분 수술이 필요 없습니다.” 최 원장은 잘라 말한다.
“허리디스크나 목디스크 환자 중에서 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마비 증세가 왔을 때, 대변이나 소변을 보는 데 문제가 생기는 배뇨장애가 왔을 때, 6개월 이상 치료를 했는데도 통증이 지속될 때입니다. 그 외에는 수술이 아닌 치료 방법으로 충분히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어요.”
최 원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운동이다. 척추 주변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꾸준히 하면 디스크로 인한 증상을 호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가끔 디스크 질환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아픈 허리를 운동으로 혹사시키는 분들이 있어요. 이러시면 절대 안 됩니다. 척추 주위 근육을 강화시키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어요. 바로 치료입니다. 정상적으로 치료를 받아 디스크 증세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놓고 의사가 안내하는 운동법에 따르는 것이 중요해요. 무턱대고 운동을 무리하게 하다간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십상입니다.”
치료 미루다 삶의 질 떨어져
최 원장은 목디스크로 다시 찾아온 이씨에게 목신경성형술을 실시했다. 최 원장의 표현을 빌리면 “대단한 수술이 아닌” 시술이다. 척추뼈 사이의 구멍을 통해 척추 경막외강에 1mm 두께 바늘 모양의 카테터를 삽입해 통증이 발생하는 부위에 약물을 주입한다. 이를 통해 신경 주위의 염증과 유착을 사라지게 만든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회복도 빠르다. 시술 후 곧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최 원장은 목이나 허리디스크 치료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치료 시기라고 조언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정상생활로의 복귀시간도 단축된다는 이야기다.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마비 증세가 올 때까지 참고 버티는 것이 최악이에요. 통증이 지속되어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불면이 계속되면 피곤함은 물론 우울증까지 올 수 있어요. 결국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겠죠. 작은 통증이라도 멈추지 않으면 빨리 병원을 찾아야 합니다.”
디스크 환자들이 쉽게 하는 실수 중 하나는 통증의 위치로 잘못된 진단을 스스로 하는 것. 허리디스크의 대표적 증상은 다리저림인데 다리가 아프다 보니 척추의 문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 원장은 “다리가 저리면 허리디스크일 수도 있고, 협착증일 수도 있고, 고관절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엉덩이 주변 신경의 문제일 수도 있어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으려면 병원부터 가야 합니다. 스스로 잘못된 진단을 내리고 방치하면 병만 키우게 됩니다.”
부주의가 큰 병 불러와
이씨가 처음 최 원장을 찾은 것은 허리 때문이었다. 그때도 부주의가 문제였다고 이씨는 말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예요. 당시 테니스에 푹 빠져 지냈는데, 집에 있어도 코트 생각만 났죠. 1997년 겨울이었어요. 빨리 손맛을 보고 싶은 생각에 몸을 제대로 풀지 않고 덤볐다가 사달이 났죠. 추운 날씨에는 충분히 준비운동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허리를 삐끗한 뒤 용하다는 한의원과 정형외과 등을 전전했지만 낫질 않아 고생하다 스포츠신문 기사를 보고 최 원장님을 찾게 됐어요. 병원에 와 보니 프로농구 용병 선수 몇 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여기서는 허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씨는 허리 치료 후 최 원장 추천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허리 근육을 강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고, 덤으로 모든 영법도 마스터했다. 이후 웨이트 트레이닝도 시작했다. 이제는 테니스 라켓을 다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정상이 됐다.
“허리가 아팠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아침에 지하철로 출근하는데 20m도 걷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몸을 제대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는 테니스도 한동안 쉬고 몸을 위한 운동에만 집중했죠.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에는 최 원장님을 가끔씩만 봬도 될 만큼 호전됐어요.”
몇 년 동안의 투병 때문인지 이씨는 자신이 허리 박사가 다 됐다고 말한다.
“한 가지 질환 때문에 20년 고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박사 수준이 돼요. 허리에 좋은 바른 자세나 운동 방법 등은 훤히 꿰고 있어요. 아무래도 앉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간혹 통증을 호소하는 동료가 있어요. 그럴 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줍니다.”
이씨는 디스크로 인한 ‘두 번째 고생’을 마치고 나서 다시 한 번 ‘바른생활’을 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한동안 운동도 열심히 하고 관리도 잘해왔는데 방심했다가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책상을 샀어요. 계속 앉아서 일하는 게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아서 틈틈이 서서도 일하려고요. 물론 걸리적거렸던 케이블도 진작에 치웠습니다(웃음). 아파보지 않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짐작조차 못할 거예요. 겪어보니 몸은 방심을 참아주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평소에 제대로 관리하셔서 건강하게 지내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