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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손

기사입력 2017-07-26 09:17

"야! 고추다! 고추!"

너무 좋아서 큰 소리로 이렇게 감탄사를 연발하신 아버지는 그 즉시 대문에 빠알간 고추와 길게 늘어뜨린 한지로 금줄을 매어놓으셨단다. 그 얘기를 하실 때마다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남동생이 대우그룹 사원으로 리비아로 가서 근무를 하게 됐을 때다. 딸 셋을 낳고 얻은 아들에게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던 엄마는 남동생을 배웅하고 나서 정신이 다 나가버렸다. 수원행 전철을 탄다고 탔는데 종착역에 가서 내려 보니 청량리역이더란다. 넋이 나가버린 엄마는 며칠 동안 초점 없는 눈동자에 갈피를 잡지 못하셨다. 여러 명의 딸들이 아들 하나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더운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생이 안쓰러웠던 내가 편지를 쓰게 되었고 우연히 그 편지를 보게 된 현장 사무실의 소장님이 “혹시 누나가 서둔야학을 다녔느냐?”라고 묻더란다. 그분은 바로 서둔야학 김재우 선생님이었는데 필자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고 후배들의 선생님이었다.

그때부터 그분은 만리타향에서 외로워하던 동생을 세심하게 보살펴주셨는데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동생을 좀 더 일하기 편한 관리소장 전속 운전기사로 소개해주기도 하셨단다. 당신이 먼저 귀국하게 됐을 때는 동생을 염려해 사무실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사무실 직원들의 배려가 많았단다. 그리고 한 번 끈이 닿으니까 전임자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후임자에게까지 연결되었다. 너무 더워서 현장에서 계속 일했다면 건강상 1년을 버티기도 어려웠을 상황이었는데 동생이 3년 세월을 잘 근무하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분 덕분이었다.

엄마는 남동생 월급이 송금되어오면 “이게 어떤 돈이냐, 우리 아들이 그 더운 나라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이다” 하시며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은행에 저금했다. 그러고는 딸들이 번 돈과 엄마가 번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셨다. 엄마에게는 딸이 번 돈과 아들이 번 돈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983년 12월, 우리 가족의 오랜 숙원이었던 내 집 마련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긴 우리 집이었다. 외할머니가 맏딸의 궁색한 살림을 걱정하면 “장모님, 걱정 마십시오. 좀 있으면 장모님이 이 문으로 들어갈까 저 문으로 들어갈까 열두 대문 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했던 아버지가 평생 못 이룬 꿈을 엄마와 자식들이 공동으로 이뤄낸 것이다.

남의 집 셋방살이, 그것도 제일 낡은 집으로만 이사를 다녔던 엄마를 커다랗고 산뜻한 양옥집에서 뵈니 부잣집 마나님같이 보였다. 천석꾼 부잣집 맏딸이었던 엄마는 더없이 만족해하셨다. 새집 기둥뿌리 하나는 김재우 선생님이 박아주신 셈이었다. 난생처음 갖게 된 우리 집은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우리 가족의 공동 은인인 그분께 우리 가족 모두는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둔야학이라는 사랑의 고리는 그 먼 나라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엄마, 엉엉, 엄마.”

1983년 2월 엄마의 회갑연에서였다. 잔칫상을 차려놓은 후 맏딸인 언니가 제안했다.

“얘들아 우리 '어머니의 마음' 같이 부르자.”

선창을 하던 언니를 따라서 부르던 우리 다섯 형제들은 잠시 후 더 이상 부르지 못하고 엄마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그동안 형극의 길을 걸어오신 엄마의 삶이 너무도 가슴 아파서였다. 한바탕 울고 난 우리에게 엄마 또한 젖은 눈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너희들 이 손 보고 꽤나 울 것이다.”

우리 앞에 내민 엄마의 손바닥은 갈퀴 같았고 손가락 마디는 있는 대로 다 불거져 있었다.

엄청난 일을 하느라 자연스럽게 닳아 없어졌던 엄마의 손톱은 그래서 일부러 깎을 필요가 없었고 양쪽 엄지손가락 지문도 지워져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애를 먹기도 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엄마의 손은 바로 엄마의 이력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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