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둔야학 소풍(4)
영등포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오목동에 있는 화산목장으로 봄 소풍을 가던 길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간밤에 내린 비가 논둑을 넘쳐서 도로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난감했다. 우리들이 주저주저하며 선뜻 건너지 못하고 있자 구두 또는 운동화를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남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당신들 등을 내미셨다. 당신의 구두와 양말은 등에 업힌 아이에게 들리고.
아이들의 신이 젖을 것을 염려하신 선생님들은 하나하나 업어서 그 길을 건네주신 것이다. 그때 말간 봄햇살에 드러난 선생님들의 다리는 유난히도 하얘 보였다.
필자도 선생님 등에 업히기를 가슴 설레며 한참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물 선생님인 조형렬 선생님이 필자를 보시더니 짐짓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셨다.
“너는 크니까 걸어서 가~ 임마.”
‘아이고 무안해라’
순간 얼굴이 화롯불을 뒤집어쓴 듯했다.
귓불까지 화끈거렸다.
‘어머 선생님,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시는 게 어딨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건너갔잖아요’ 하고 속으로만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까 그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왜 가을날의 홍옥빛이었을까?
필자는 왜 그렇게도 눈치가 깜깜이었을까? 아까부터 필자를 제쳐두고 다른 애들만 서둘러 업어주던 선생님의 심중을 진작에 간파했어야 하는 건데.
수줍은 성격의 선생님 등에 업히기에는 필자가 너무 컸었나보다.
앞에 업힌 애들은 다 필자보다 키가 작았으니까.
토마스 하디의 ‘테스’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업어서 시냇물을 건네준 엔젤은 테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라헬을 건네주기 위해서 세 레아를 건네주었다”라고.
그러나 필자는 선생님의 레아도 라헬도 아니었다. 그 바람에 작은 애들은 신을 적시지 않았는데 필자는 신을 몽땅 다 적시며 길을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코가 뾰족하고 키가 장대 같은 미군들이 야학을 방문했다. 우리들에게 예방주사를 놓아주려고 온 것이었다.
우리들은 왼쪽 팔뚝의 옷을 미리 걷어 올리고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끝도 없이 서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얼굴의 미군들은 무표정한 사람도 있었지만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필자 차례가 되었다. 알코올을 묻힌 솜이 왼편 팔뚝을 ‘쓱’ 닦고 지나가더니 아주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는 동시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간단히 따끔하고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사탕은?
‘달랑 하나?’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앞의 작은 아이들은 두 개씩 주었는데 필자는 한 개만 주었던 것이다. 그 사탕이 필자 손에 쥐어 쥘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내게도 당연히 두 개를 주겠지’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밖에 안 주다니….
무슨 예방주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미군들은 우리들에게 주사를 한 대 놓고는 사탕을 주었다. 커다랗고 누런 종이 상자에 가득 담긴 사탕은 다이아몬드처럼 생겨 배가 볼록 튀어나왔고 펄이 섞인 듯 ‘알록달록’한 색상이 너무도 고왔다.
먹어보니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사탕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그 뒤 어떤 사탕도 필자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다.
이때나 지금이나 필자는 늘 평균의 키와 몸집이었는데 사람들 눈에는 큰 키로 보였다보다. 그때처럼 키가 작은 아이들이 부러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봄 소풍 날 두 번째로 작은 아이들이 부러웠다.
조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시며 목소리는 버터 바른 듯해서 꼭 미국 사람 같았다. 걸음을 걸을 때도 상당히 절도 있게 걸어서 인상 깊었던 조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멘델의 법칙, 드 프리스의 돌연변이설 등을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선생님들은 소풍을 갈 때마다 우리들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셨고 당신들 돈으로 사진을 빼서 야학생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셨다.
사진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지금하고는 비교되지 않는 흑백 사진이었다. 크기도 작아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군지 잘 구분도 안 되는 사진이지만 지금 들여다보면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는 고마운 사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