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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

기사입력 2015-09-11 23:19

(함철훈 사진가)
(함철훈 사진가)

하늘에 별과 달이 있다면, 땅에는 풀과 꽃이 있다. 몽골의 여름 초원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온몸으로 기억할 것이다. 계절이 봄을 지나 가을이 시작되기 전의 여름이라야 한다. 세상 꽃의 원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즈음 거기에 다녀온 내 친구는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많은 꽃을 만났다. 늦은 나이에 무슨 꽃 타령! 그래도 좋다.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내게 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꽃은 하늘의 구름, 우리의 달 항아리처럼 사내를 철들게 하는 창조주의 세심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남쪽 톨강과 자이슨을 싸안고 있는 나지막한 산에는 소나 낙타들이 어슬렁거리고, 여기저기 누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낯설도록 평화롭다. 조금 더 오르면 나무나 관목이 없는 느슨한 구릉이다. 거기에는 온통 키 작은 들꽃으로 빽빽하다. 아무데서나 그냥 언덕을 오르면 모두 꽃밭이고 풀밭이다. 땅바닥에서 흙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 귀하게 취급받는 에델바이스 또한 흔하다. 다람쥐와 새, 그리고 나비와 벌들도 바쁘게 평화롭다.

아내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펴, 걸어 말리기에 좋은 들풀들을 모아 싼다.

비가 한 차례 더 후드득 지나간다. 아내에게 양산을 펴주고, 난 비옷을 꺼내 덧입었는데 이내 그친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 하늘은 더 파랗다.

개울물이 늘어 소리 또한 청량하고 맑다.

딛고 오르는 땅과 풀의 감촉이 더할 나위없다.

초원을 지나 산에 오를수록 갈잎과 자작나무가 빼곡한 숲이다.

관목이 둘러싸인 풀밭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들꽃과 각종 나무향이 코끝을 스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묘사했던 숲의 몇 장면이 떠오른다.

마침 윙윙 소리를 내며 두터운 몸집의 호박벌이 지나간다.

그가 나오는 영화 ‘일 포스티노’를 다시 보고 싶다.

(함철훈 사진가)
(함철훈 사진가)

집에 돌아와 아내가 가져온 들풀을 세 종류로 나누어 노끈으로 묶어 창가에 걸어 놓았다. 오종종한 녀석들, 긴 녀석들, 그리고 에델바이스. 함께 싸온 풀과 꽃을 구분하며, 색과 선의 세련됨에 우린 새삼스레 다시 놀란다.

땅의 풀들은 풀대로, 하늘의 별들은 별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사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늙은이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비밀의 코드가 드러나 보인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특별한 무슨 얘기나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름다움이며, 사랑이다. 색은 색대로, 선은 선대로, 감촉은 감촉대로 그 자체가 의미이며 감동이다. 꽃도 구름처럼 추상이다.

그래서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이다.

나 같은 평민은 감히 우주를 가까이 볼 수 없다. 나와 우주는 별개가 아니며 내 머리 위가 하늘이고 바로 우주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 한 하늘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아무리 하늘을 오래 쳐다보아야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을 하며 꽃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볼수록 새롭게 열리는 꽃의 아름다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래, 아주 오래 볼 기회를 여러 번 갖다가 알게 되었다.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적인 척도가 공간과 호환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사진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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