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기 칼럼니스트

“손주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
요즘 손주 돌보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다. 이유를 들어보니 손발과 허리가 아프고 힘이 달린다는 게 하나고 또 하나는 내 여유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이는 신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을 수취 거부하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와 어울릴 때 그 모습을 보라. 우선 얼굴이 놀랍도록 환해진다. 주름진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번지고 굳었던 몸이 유연해진다. 이게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심리학, 생물학, 철학, 행동과학, 문화적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는 오묘한 삶의 참모습이다.
첫째, 심리학적으로 상호작용 효과가 있다.
아이의 웃음과 호기심은 그대로 노인의 정서를 자극한다. 이른바 ‘거울 효과(Mirror Effect)’다. 아이가 웃으면 노인도 따라 웃는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의 과제를 ‘자기 통합’이라 했다. 손주와의 교류는 내 삶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안도감을 주고 삶의 연속성을 확인하게 만든다.
둘째, 생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아이와 놀며 생기는 스킨십과 웃음은 노인의 뇌에서 옥시토신을 분비시킨다. 안정과 행복을 주는 호르몬이다. 또 새로운 놀이와 대화는 뇌의 신경망을 다시 활성화한다. 실제 연구에서도 손주와 시간을 보낸 노인의 인지 기능이 개선된다는 보고가 있다.
셋째, 철학적으로는 ‘시간의 역전’이 일어난다.
노인은 삶의 끝자락에 있고 손주는 막 출발선에 서 있다. 두 시점이 만나면 삶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으로 느껴진다. 어린 존재와의 교감 속에서 노인은 잃었던 생기를 되찾는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체험에 가까운 일이다.
넷째, 행동과학적으로 운동효과가 있다.
공놀이, 산책, 그림 그리기 등 손주와의 활동은 노인에게 필수적인 신체 자극을 준다. 단순히 앉아 있는 것보다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이 노화를 늦추고 활력을 불러온다. 행동과학은 이를 ‘활동 가설(Activity Hypothesis)'로 설명한다. 인간은 은퇴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해야 심신이 건강해지고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이론이다.
다섯째, 문화적으로는 세대 간 연결고리가 된다.
전통 사회에서 노인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생활의 지혜를 전하며 삶의 존엄을 회복했다. 반대로 손주는 조상의 세계와 연결되며 안정감을 얻게 된다. 세대 간 교류는 양쪽 모두에게 삶의 만족을 높이는 길이었다.
할머니·할아버지가 손주와 노는 것은 노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다. 심리적으로는 위안을, 생물학적으로는 활력을, 철학적으로는 순환의 의미를, 행동과학적으로는 신체 자극을, 문화적으로는 세대의 연속성을 제공한다. 노인이 손주와 어울리면 몸과 마음이 젊어진다. 아이의 웃음 속에서 자신의 청춘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지나간 그 옛날이 어제 같은데/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한때 크게 유행했던 우리 가요다. 트로트 명인 현철씨도 불렀고 가황 나훈아도 불렀다. 가사가 구구절절 가슴에 다가온다.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니 그나마 젊게 살려면 손주들과 노는게 최고다. 이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놀아주는 것도 다 때가 있다.
신은 노년의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다. 손자 손녀와 함께 웃으며 즐겁게 노는 일이다. 손자 손녀 오는 날이 장날이다. 이 날이 잔칫날이고 운동회 하는 날이다. 아름다운 축일이다.
윤은기 칼럼니스트는 교수·방송인·작가 등으로 활동했다. 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차관급)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협업발전포럼 회장과 대한민국 백강포럼 회장으로 활약 중이다. ‘협업 전도사’로 불리며 ‘Mr. 콜라보’라는 별명까지 얻은,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데 열정을 쏟는 대표적 액티브 시니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