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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을 버틸 힘, 사랑의 기억… ‘3월의 마치’로 돌아온 정한아 작가

기사입력 2025-04-22 08:55

[북인북] 세 번 만에 완성… “신인 때처럼 떨려”

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그녀의 몸무게는 55킬로그램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변함없이 그 몸무게를 유지했다. 그녀는 배우였다. (…)

생일날 아침 이마치는 평소대로 몸무게를 재고 깜짝 놀랐다.

59라는 숫자가 깜빡거리다가 사라졌다.

전날까지 분명 55킬로그램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몸무게가 늘 수도 있는 걸까?

- ‘3월의 마치’, 7~8p

등단 20주년을 맞은 정한아 작가가 장편소설 ‘3월의 마치’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수지·정은채 주연 드라마 ‘안나’의 원작 ‘친밀한 이방인’ 이후 긴 공백을 깨고 출간한 이번 작품은, 한 인간이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지만 불가능한 방법을 탐색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이야기는 배우 이마치의 60세 생일날 아침에 시작된다. 엄격하게 유지해온 체중이 하룻밤 사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 점차 기억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능숙하게 해오던 연기 생활에도 차질이 생기고, 집에서는 낯선 목소리가 들리며, 급기야 유령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마치는 저주가 깃든 듯한 그 집을 떠날 수 없다. 실종된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수십 년을 지켜온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마치는 결국 뇌질환 전문의를 찾아간다. 그렇게 알츠하이머 전 단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개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맞춤 제작한 가상현실(VR) 치료를 제안받는다.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그의 심연 속 시공간까지 복원한 가상세계로 빠져들고, 그 안에서 층마다 다른 시기의 자신이 살고 있는 거대한 아파트를 마주한다. 과거를 직면한 이마치는 잃어버린 기억과 감정을 되찾으며 자신의 인생을 재조명하게 된다.

소설은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유동적인지, 우리가 믿는 기억이 얼마나 진실한지 묻는다. 과거를 되찾는 것이 행복한 결말을 보장할까?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간직해야만 삶이 완전해질까? 정한아 작가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며 삶과 기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정한아 작가의 저서와 사인
▲정한아 작가의 저서와 사인

거듭된 퇴고의 산물

‘달의 바다’, ‘리틀 시카고’, ‘친밀한 이방인’ 등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정한아 작가. 그의 작품 중 ‘친밀한 이방인’은 2022년 쿠팡플레이에서 ‘안나’로 드라마화된 뒤 역주행 열풍을 일으켰다. 작은 거짓말을 시작으로 인생 전체가 거짓이 되어버린 안나의 파국적인 이야기를 다룬 해당 작품은 탄탄한 서사를 바탕으로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작가 선배들이 ‘책마다 자기 운명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이런 거였구나 싶었어요. 감사하게도 좋은 감독님을 만나 작품을 어떻게 전개할지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고, 배려받는다고 느꼈어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더라도 계절마다 만나 커피 마시며 이야기도 나눴죠. 정말 친구처럼요.”

‘친밀한 이방인’을 발표한 지 8년이 흘러 선보인 신간 ‘3월의 마치’는 세 번에 걸쳐 퇴고한 작품이다. 집필을 시작할 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딸은 6학년이, 엉금엉금 기어다니던 아들은 2학년이 됐다.

“초고는 정말 오래전에 썼는데, 너무 못마땅해서 두 번을 엎었어요. 세 번 만에 완성했네요. 과정이 늘어질수록 확신은 줄어들었어요. 이제 등단한 지 꽤 지났고, 주제 의식이 더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이 깊었죠. 간만에 발표한 책인데, 신인 때처럼 떨리네요.(웃음)”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두려움을 마주할 순간

촘촘하게 짜맞춘 줄거리를 구성한 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정한나 작가. 주인공은 성공한 예순 살의 여성 배우 ‘이마치’로 설정했다. ‘국민 엄마’로 불리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진짜 엄마로서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압박에 잠겨버린 인물에게 알츠하이머가 파도처럼 들이닥치도록, 증상을 완화할 방법으로 VR 치료를 선택하도록 그려냈다.

“저는 10년 전부터 노년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나이 들수록 무력한 존재가 된다는 것,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막연한 공포 중 하나기도 하잖아요. 자기가 속한 계급 이외의 이야기를 쓰는 건 윤리적 모독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정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첫 가닥을 잡았죠. 변화하는 삶의 고민과 고통을 짚는 게 소설가의 일이라 여기기도 하고요.”

소설에 등장하는 거대한 가상의 아파트는 한 층마다 한 세대가 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해당 층수와 동일한 나이의 이마치가 당시 거주하던 집이 등장한다. 전 생애의 인물이 각자의 공간이자 한 건물에서 살아 숨 쉬는 셈이다. 치밀한 구조 덕에 이마치가 잊고 있던 각 시절의 감각은 강렬하고 빠르게 돌아온다.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니의 마지막을 홀로 지켰던 기억, 철저히 자식을 방치한 채 외면하고 학대했던 엄마에 대한 기억도 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이마치는 ‘자연스러운 노화’를 운운하면서

뇌 영양제 따위를 처방해줬던 노의사를 찾아갔다.

난동을 부리다시피 진료실로 뛰어들어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차례로 읊었다.

직업을 잃고, 자신의 이름을 잊고, 망상을 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자신이 ‘전 단계’라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삶이 어디까지 더 망가져야 하는지,

추락을 승인받을 방법은 뭔지 물었다.

- ‘ 3월의 마치’, 34p


전부 놓아줄 용기

그렇게 그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며 삶의 파편들을 맞춰나간다. 방치했던 딸의 사춘기를 다시 바라보며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아들을 잃어버려 일상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즈음의 40세, 43세와 현재의 60세 이마치가 대립하며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 상처를 꺼내는 과정도 겪는다. 잊고 있던 비극까지 서서히 드러나지만 삶을 얽맨 일련의 과거는 더이상 ‘주체’를 휘두르지 못한다. 마침내 이마치는 붙들고 있던 고통들을 뜨겁지도 시원하지도 않게 그저 흘려보낸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 미워한 탓에 평생 원하는 방향과 반대의 선택을 하는 방식으로 본인에게 벌을 주며 살았습니다. 직업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여겼지만, 과거 곳곳에는 그를 버티게 한 ‘타인의 사랑’이 스며 있었죠. 여러분 역시 주인공처럼 시간 속에 깃든 관계와 사랑의 소중함을 한 번쯤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12월에 태어났지만 3월까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이마치라는 이름이 붙은 그에게 소중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꽤 오랜 시간을 저와 함께한 친구죠. 이마치가 봄이 시작되는 계절에, 그럼에도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갖길 바랍니다.”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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