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목적 위해 심리적 지배… 위험 느낀다면 주변에 도움 요청
“너를 위한 거야”라며 가면을 쓰고 상대를 조종하는 행위, 가스라이팅(Gaslighting).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고, 주변인들과 격리해 가해자에게만 의존하도록 하는 일종의 심리적 학대다. 심리적 지배라고도 하는 가스라이팅은 가정, 연인, 친구 등 가까운 사이에서 자주 발생한다.
최근 세 딸이 60대 친모를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제3자인 한 무속인이 세 딸을 ‘가스라이팅’했다는 점이다. 범행 이후에도 세 딸은 무속인의 잘못을 줄이고 감싸려고 했다. 이 무속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를 가족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범죄 사건에서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일까. 2021년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는 ‘가스라이팅’이었다.
“나니까 네 이야기를 들어주지”
가스라이팅은 누구나 당할 수 있지만 자신이 피해자거나 가해자라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른 폭력과 달리 연인, 부부, 부모 자녀, 상사와 부하직원과 같이 아는 사이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대체로 평등한 관계보다는 위계질서나 권력 구조가 있을 때 발생한다.
심리적 지배는 “내가 아니면 누가 네 이야기를 들어주겠니. 널 위하는 건 나밖에 없어”라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관심인지 학대인지 깨닫기가 어렵다. 이후 가해자는 반박과 무시를 반복하며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돌연 화를 내면서 상대가 마치 문제가 많은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피해자는 ‘내가 잘하고 있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가해자에게 확인하게 된다. 가해자가 어떤 판단을 해주기를 기다리게 되는 것. 즉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심리에 조작을 하는 행위다. 더불어 가해자는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내가 널 제일 잘 알아. 다른 사람들은 너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거야”라며 주변의 관계들을 끊어놓고, 오로지 가해자 본인에게 의지하도록 만든다.
용기 내 단절하기
만약 주변의 누군가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 같다면, 가해자를 설득해 바꾸려고 하기보다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사람들은 거절을 잘못 하거나, 지나치게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이 많다. 따라서 관계 단절이 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박사는 “상대가 어떤 지시를 했을 때 ‘알겠어’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해볼게’라고 대화의 주체를 나에게로 가져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설사 상대가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 가해자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해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거절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상대와 있었던 일을 문자나 이메일로 저장해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변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나 전문가와 상담하고 도움 요청을 주저하지 말자.
가스라이팅 자가진단 체크리스트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의 자가진단표와 심리 전문가들의 체크리스트를 재구성했다. 아래 내용 중 한 항목이라도 여러 번 겪었다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봐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상대와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
1 간단한 결정도 스스로 내리기 어렵고, 왠지 몰라도 항상 상대방 방식대로 일이 진행된다.
2 상대에게 “너는 너무 예민해”, “이게 네가 무시당하는 이유야”, “비난받아도 참아야지”, “나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 “너 혼자 상상한 것이겠지” 등의 말을 들었고, 스스로 내가 예민한 건 아닌지 자주 돌아본다.
3 주변에 상대에 대한 변명을 하게 되고, 결국 상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게 된다.
4 내 생각보다는 상대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가 좋아하는지보다 상대가 좋아하는지를 늘 염두에 둔다.
5 상대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하고, 상대가 화를 낼까 봐 안 해도 되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
6 상대를 알기 전보다 자신감이 없어졌고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됐다.
▲영화 가스등 포스터영화 ‘가스등’
“아니야. 당신 예민해서 그래”, “또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야?”
남편 그레고리는 일부러 집 안의 등을 어둡게 해두었으면서 아내 폴라가 “여보, 가스등이 너무 어둡지 않아요?”라고 물을 때마다 시치미를 뗐다. 폴라는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신을 의심하게 됐다. 그러면서 그레고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 영화의 원작은 1938년에 만들어진 연극 ‘가스등’이다. 주인공인 남편은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해 아내의 심리를 조작했다. 미국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은 이 작품을 인용해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