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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결혼식, 두 번의 축의금

기사입력 2020-05-27 09:34

작년 가을 토요일, 다급하면서도 화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공부도 잘했지만 특히 매사에 빈틈없고 치밀하기로 자타가 인정하는 황 교수였다. “얌마! 너 뭐하고 있냐? 뭐? 집이라고? 오늘 철수 딸, 윤희 결혼식이잖아! 지금 나는 결혼식장에 와 있는데. 어휴~ 이것들, 상민이도 아직 안 보이니까 빨리 연락하고!”

애고! 내 건망증이 또 도졌군. 50년 지기 친구 혼사를 잊다니…. 순간 앞이 캄캄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우선 상민이에게 연락했다. “황 교수가 지금 결혼식장에서 찾고 있던데, 너 어디야? 뭐? 애구, 너도 까먹었구나. 좌우지간 빨리 식장으로 오래!” 마침 외출 중이던 상민이는 내 전화를 받고 황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어, 이상하다

황 교수는 일산에서 강남까지 오느라 결혼식장인 성당에 10분 늦게 도착했다. 뛰어들어오면서 안내판의 신부 이름을 보니 ‘이 크리스티나’다. 아! 윤희의 세례명이 크리스티나였구나. 신부 측 축의금 접수대로 달려가 봉투를 던지다시피 냈다. 초등학교 모임이 없으니, 중학교 동기들이 가장 오랜 친구라 나름 성의껏 마련한 금액이었다. 2층 본당으로 올라가 원일이와 상민이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훑어봐도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덜렁대던 녀석들이 나이 들면서 더 심해졌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원일이에게 전화를 거니 이번에도 또 깜빡했단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깍듯이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며 화를 누른다.

신랑 신부와 혼주들은 혼배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뒷모습만 보이다가 가끔 기도를 위해 일어섰다. 아빠를 닮아 어릴 적부터 통통했던 윤희였는데 저렇게 날씬한 걸 보니, 결혼을 앞두고 몸매 관리를 잘 받았나보다. 게다가 신랑이 결혼반지를 끼워줄 때 돌아선 옆얼굴을 보니 많이 고치기까지 했다. 무척 예뻐졌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 황 교수는 그리 생각했다.

성당 신부님이 혼주들에게 인사할 기회를 줬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철수 키가 너무 크다. 머리숱도 풍성하다. 어~?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래서 슬쩍 가까이 가보니 철수가 아니다. 부인도 황 교수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축의금 소동 이후

택시를 타고 달려가던 상민이와 원일이는 황 교수의 연락을 받고 중간에 내렸다. 거의 매주 토요일 낮 동일한 시간대에 혼배미사가 열리는 성당, 같은 성씨의 신부 세례명을 크게 적어놓은 안내판, 그리고 지각으로 인한 다급한 마음이 빚어낸 상황이었다. 여기에 일주일을 당겨 메모해놓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황 교수의 실수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상민이와 원일이는 그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그가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축의금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날, 철수한 접수대를 수소문해 축의금을 돌려받으라 했지만, A형인 황 교수는 먼 데만 바라봤다. 상민이와 원일이가 장난삼아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한 축의금 액수가 얼마였는지 도통 말하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 갑자기 친구들 마음이 넓어졌다. 가장 까탈스러웠던 황 교수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부터다. 우선 네 명 중 두 명만 먼저 모이면 친구들 지각은 무제한 용서된다. 그리고 한 친구가 약속을 잊고 불참해도 뒷담화 없이 너그럽게 모임을 진행한다.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졌다. 모두들 자신이 없어져서인지 더 이상 자신의 기억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간 질색했던 ‘말 끊기’도 허용하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잊어버릴까봐 상대 이야기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럴 때면 대화는 종종 길을 잃고 삼천포로 빠지곤 했다.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는 절망감까지 들었다. 이런 상황을 몇 번 겪은 후, 말 끊는 친구에게 벌칙으로 식사비나 커피 값을 부담하도록 했다. 그런데 ‘결혼식 축의금 사건’ 뒤로 그 규칙도 없애버렸다. 대화가 삼천포로 빠지면 그냥 낄낄거리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기억력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져서가 절대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포용력이 매우 깊어지는 나이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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