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열세 번째 세계유산, ‘한국의 산사 7곳’ 일곱 번째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일곱 번째는 해남 대흥사로 ‘한국의 산사 7곳’을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다.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은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면서도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열세 대종사 가운데 한 분, 초의 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산대사가 모셔짐과 더불어 ‘호국과 차(茶)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 제508호, 명승 제66호로 지정된 명찰(名刹)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으며, 남원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별원에는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대흥사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포함하여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나름대로 구획정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하촌 식당가를 지나면 대흥사가 자랑하는 십리 숲길, 또는 아홉 번 굽었다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는 멋진 숲길을 지난다.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인데, 시간이 되면 걸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려는지 숲길의 초입에는 거대한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는 통상의 일주문이 서 있는데 사명(寺名)의 변화를 보여주듯 산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라고 씌어있고, 일주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일주문의 뒷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커다란 현판을 달았는데, 선(禪)과 교(敎)의 종원(宗院)으로 동국(東國) 최고의 선원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나무로 만든 사찰 정승과 최근 새롭게 깎아 세운 돌 정승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자부심이 있는 도량(道場)이라는 석주(石柱)를 지나면 수 십 기의 승탑과 탑비가 보인다. 사명대사와 초의선사 등의 승탑이 모여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승탑들을 둘러본 후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달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면 비로소 경내로 진입한 것이다. 해탈문에는 좌우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뒷산이 누워계신 와불(臥佛),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면의 건물군이 남원, 왼쪽 개울 건너가 북원이며,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표충사 등 별원 지역이다.
우선 대웅보전을 보기 위하여 왼쪽 북원으로 향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홍교 다리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로 들어서면 일직선상에 대웅보전이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대향각, 우측은 백설당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대웅보전의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했다는 사자머리 한 쌍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대 위 고정 쇠고리를 물고 있는 용두(龍頭)가 눈길을 끈다. 또한 대웅보전의 오른쪽 응진전 옆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한다.
남원 구역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등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그 입구는 5칸 건물 가허루(駕虛褸)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면에 천불전(보물 제1807호)이 있고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 등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역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가허루(駕虛褸)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는데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모셔 자신의 글씨를 내보이자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비꼬았다고 한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예에 새로운 눈을 뜬 추사가 나중에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껏 푸대접했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시 달도록 하였으며, 창암은 이미 죽고 없자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손수 써주었다고 한다.
남원의 중심건물 천불전(千佛殿)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을 모셨다.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 선사(玩湖尹佑禪師)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 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 하에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玉)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하였다.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한 천불은 두 척의 배에 실려 경주를 떠났는데 그중 한 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까지 흘러갔다. 기쁜 마음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봉안하려 하자 현감의 꿈에 현몽하여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알려주어 다시 돌려보냈다는데, 그렇게 일본에 갔던 불상들 밑면에는 ‘日’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남원의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을 지나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가 있다. 이곳은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한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옆에는 장군 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고 호국문을 지나 내삼문 격인 예제문(禮齊門)을 들어서면 표충사와 비각이 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당이 있는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대흥사를 호국의 성지라고 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별원 지역의 표충사를 보고 나서 내친김에 발걸음을 계속 위로 향하니 호젓하게 절에서 멀어지면서 대광명전 지역이 나왔다. 동국선원이 있어 지금은 선원(禪院)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부득이 추사의 친필이 있다는 동국선원을 지나쳐 산으로 오른다. 험한 산길을 40분 넘게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북암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54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북미륵암에는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龍華殿)과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지방문화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 하나 더 있다. 힘들게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열성 답사꾼이거나 불심이 깊은 신도가 아니면 찾기 힘든 북미륵암에 올라 국보 마애불상을 친견하고 나니 대흥사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알겠다. 그 옛날 이토록 힘든 곳에 불상을 새긴 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며, 부처의 가피로 무엇을 이루고자 열망하였을까.
산사 일곱 곳 답사를 마치며
111년 만의 폭염이었다는 금년 여름 8월 한 달 동안 열세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곱 곳 산사에 대한 연속 답사를 모두 마쳤다. 마곡사를 시작으로 법주사, 봉정사, 선암사, 부석사, 통도사에 이어 대흥사까지 돌아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시 한 번 열세 번째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이제 우리의 보물이 아닌 세계의 보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답사를 마친 후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거나 자화자찬에 열중할 게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 부끄럽거나 부족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문화재청과 소속 지방자치단체, 유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해당 사찰 관계자들이나 조계종과 태고종 실무자가 연합하여 시정, 보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일곱 곳 산사를 돌아보니 충실하게 준비한 소개자료, 즉 브로슈어(brochure)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통도사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를 포함해 잘 준비하였으며 법주사 정도가 인쇄물 형태로 건네주었다. 선암사는 자체 제작한 듯 성의껏 자료를 준비하였으나 다소 미흡했고, 사찰을 소개하는 안내 자료 한 장 없는 곳이 많았다.
또한 일곱 곳 사찰 입장료도 최소 1200원부터 최대 4000원까지 몇 배의 차이가 났다. 여전히 카드결재는 안 되고 현금만 가능하다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찰 매표소 직원들이 절집과는 무관한 듯 세련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것이 거슬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촬영 금지가 지나치다. 예불이 진행 중이거나 행사 등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이유 막론하고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안내와 설명에 필요한 인원, 표지판 등이 많이 부족하다. 세계유산이 된 이상 외국어 능력도 구비한 안내요원이 상주해며, 적재적소에 다양한 언어로 설명을 비치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밖에 화장실과 세면장, 음료수 급수대, 휴게시설 등을 수준 높게 구비하길 바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비록 종교시설이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도 많지만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