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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佛千塔 이야기③ 안동 봉정사(鳳停寺)

기사입력 2018-09-06 11:46

우리나라 열세 번째 세계유산, ‘한국의 산사 7곳’ 세 번째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세 번째는 안동 봉정사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봉정사는 조계종 16 교구 본사인 의성 고운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꼽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보유한 고찰(古刹)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심포 건축인 극락전과 가장 오래된 다포 건축인 대웅전이 각각 마당을 갖춘 병립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대웅전의 석가 신앙과 극락전의 아미타 신앙을 구현한 봉정사에는 종합 승원으로서 스님들과 신도들의 신앙과 수행, 생활을 위한 다양한 건축물들이 존재하며, 아직도 주변 밭에서 음식재료를 재배하고 식용하는 수행 합일을 실천하는 산사(山寺)이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으며,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을 보고 싶다며 찾아와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세계유산에 등재된 올여름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들르며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이 쏠린 곳이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이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히며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로도 수행을 이어간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 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이후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그리고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봉정사는 7개 산사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절집이며 여느 사찰처럼 오 리나 십 리 숲길도 없고 초입이나 산자락 어딘가에 수십 개의 승탑이나 탑비가 줄지어 있지도 않으며, 높다란 당간지주나 우람한 산문이 위압적으로 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해탈문이나 사천왕문도 없다.

안동시내에서 30분 남짓,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절 아래 사하촌도 복잡하지 않아 그 흔한 산채백반 식당가도 없고 몇 채의 민가와 식당이 있을 뿐이다. 매표소를 거쳐 오르막 왼쪽으로 퇴계 이황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 명옥대(鳴玉臺)를 지나면 잠시 평지가 되는 곳에 일주문이 서 있다.

▲언덕길을 오르면서 지붕부터 서서히 나타나는 봉정사 일주문.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둥근기둥을 세워 맞배지붕을 얹었다. 화려한 다포식 공포와 풍판을 둘렀는데 1900년도에 세웠다고 하니 120년쯤 된 셈이다. (김신묵 동년기자)
▲언덕길을 오르면서 지붕부터 서서히 나타나는 봉정사 일주문.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둥근기둥을 세워 맞배지붕을 얹었다. 화려한 다포식 공포와 풍판을 둘렀는데 1900년도에 세웠다고 하니 120년쯤 된 셈이다. (김신묵 동년기자)

일주문을 지나면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인데 이내 평지 주차장 겸 작은 절집 앞마당이 나온다. 다시 경사진 돌계단을 올라 만세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하면 대웅전이다. 제법 긴 오르막 지형인데 그리 험하거나 지루하게 길지는 않아 차분하게 올라갈 수 있다.

▲만세루(萬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 부처님의 법(法)이 만년 세세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2층 누각인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아래층 중앙을 통해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간다. 이층에는 법고, 목어, 운판이 있으며 범종은 따로 범종각에 있다.(김신묵 동년기자)
▲만세루(萬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 부처님의 법(法)이 만년 세세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2층 누각인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아래층 중앙을 통해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간다. 이층에는 법고, 목어, 운판이 있으며 범종은 따로 범종각에 있다.(김신묵 동년기자)

▲누각 아래 중앙통로 계단으로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고 부딪힐까봐 머리를 숙이게 되는데, 올라서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니 몸가짐을 조신하게 갖추라는 배려이다. 또한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면서 시야가 탁 트이는 극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건축물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누각 아래 중앙통로 계단으로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고 부딪힐까봐 머리를 숙이게 되는데, 올라서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니 몸가짐을 조신하게 갖추라는 배려이다. 또한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면서 시야가 탁 트이는 극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건축물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만세루에는 일주문과 같이 ‘天燈山鳳停寺(천등산봉정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씨가 비슷해 보인다. 일주문 현판(왼쪽)은 진주 출신 근대 명필 隱樵(은초) 정명수(1909~1999) 선생의 글씨이며, 만세루 현판(오른쪽)은 독립운동가 東農(동농) 金嘉鎭(김가진)의 글씨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만세루에는 일주문과 같이 ‘天燈山鳳停寺(천등산봉정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씨가 비슷해 보인다. 일주문 현판(왼쪽)은 진주 출신 근대 명필 隱樵(은초) 정명수(1909~1999) 선생의 글씨이며, 만세루 현판(오른쪽)은 독립운동가 東農(동농) 金嘉鎭(김가진)의 글씨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누각 2층 안쪽에는 ‘萬歲樓’(만세루) 현판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과 ‘德輝樓’(덕휘루) 현판이 걸려있다. 즉, 만세루가 한때는 덕휘루였다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만세루로 바뀐 것인데 ‘癸丑中夏(계축중하) 金嘉鎭(김가진)’이라는 낙관을 보면 1913년 여름에 썼다는 것이니 최소한 100년 정도는 덕휘루라 불렀던 것 같다.

덕휘루라는 명칭은 이곳을 유생들이 제법 많이 찾아와 공부도 하고 경전을 읽으며 지낸 흔적이라고도 한다. 입구에 명옥대가 있는데, 이는 유교와 불교가 반드시 배척한 것만은 아니고 잘 지내기도 했다는 흔적으로 보인다.

▲만세루 2층 안쪽의 萬歲樓(만세루) 현판(왼쪽)은 石能(석능) 金斗漢(김두한)의 글씨인데 화엄강당과 무량해회 현판도 같이 썼다고 하나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반대쪽에는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현판과 德輝樓(덕휘루) 현판이 있는데(오른쪽) 나무아미타불 현판은 ‘이추담인’이라고 낙관이 되어있는데 누구인지 알 수 없다.(김신묵 동년기자)
▲만세루 2층 안쪽의 萬歲樓(만세루) 현판(왼쪽)은 石能(석능) 金斗漢(김두한)의 글씨인데 화엄강당과 무량해회 현판도 같이 썼다고 하나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반대쪽에는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현판과 德輝樓(덕휘루) 현판이 있는데(오른쪽) 나무아미타불 현판은 ‘이추담인’이라고 낙관이 되어있는데 누구인지 알 수 없다.(김신묵 동년기자)

만세루에 올라서면 대웅전 마당인데 왼쪽에 있는 극락전을 먼저 보기로 한다. 극락전 앞에는 대웅전 앞 만세루처럼 우화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영산암으로 옮겼다고 하며 바라보는 정면이 극락전, 왼쪽에 고금당, 오른쪽에 화엄강당이 ‘ㄷ’자 형태로 모여 있고 마당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영역, 왼쪽이 고금당(古金堂, 보물 제449호)이며 앞마당에는 3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이 있고 오른쪽은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인데 앞쪽은 대웅전 마당을 향해 있어 이쪽은 뒷면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영역, 왼쪽이 고금당(古金堂, 보물 제449호)이며 앞마당에는 3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이 있고 오른쪽은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인데 앞쪽은 대웅전 마당을 향해 있어 이쪽은 뒷면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봉정사 극락전은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통칭되어 왔으나 1972년 완전 해체 시 발견된 상량문에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한 기록이 나옴으로써 1376년 중수한 무량수전에 앞서는 건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옥의 건물 중수(重修)는 대개 150년에서 200년을 지낸 후에 하게 되므로 건축연도를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정확한 건축연도가 나온 것은 아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을 묶어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하는데 건축양식은 극락전이 더 고식(古式)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참고로 창건연도가 확실한 건물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1308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지만 측면 칸은 좁아서 정면이 긴 직사각형 건물이며 배흘림기둥을 세운 주심포식 맞배지붕 형식이다. 1972년도 해체 복원 시 근대식 안료를 이용한 단청을 했다는 등 졸속 복원의 비난이 있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극락전에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불이신 아미타불을 혼자 모셨으며 천장에는 단청은 하지 않았지만 정교하고 복잡한 장식을 갖춘 닫집이 장엄을 더해준다. 후불탱화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함께 그린 삼존도상인데 고종 37년(1900)에 그렸다.(김신묵 동년기자)
▲극락전에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불이신 아미타불을 혼자 모셨으며 천장에는 단청은 하지 않았지만 정교하고 복잡한 장식을 갖춘 닫집이 장엄을 더해준다. 후불탱화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함께 그린 삼존도상인데 고종 37년(1900)에 그렸다.(김신묵 동년기자)

극락전 옆은 대웅전 영역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보물 제55호였으나 2009년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선덕 10년: 1435년, 세종 17년)이라고 적혀있고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라고 되어있어 대웅전 창건이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나 앞선다는 것이니,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다시 대웅전으로 바뀔 판이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되어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대웅전(국보 제311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특이하게도 사대부집에나 있을법한 툇마루에 난간까지 있지만 통행은 금지되었다. 툇마루는 후대에 추가로 붙인 듯한데 유교의 흔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면(아래) 정면이 만세루 2층이며 오른쪽은 화엄강당, 왼쪽은 요사채로 쓰이는 무량해회가 있는 네모꼴(ㅁ) 구조로 석탑이나 석등 하나 없이 간결하다.(김신묵 동년기자)
▲대웅전(국보 제311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특이하게도 사대부집에나 있을법한 툇마루에 난간까지 있지만 통행은 금지되었다. 툇마루는 후대에 추가로 붙인 듯한데 유교의 흔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면(아래) 정면이 만세루 2층이며 오른쪽은 화엄강당, 왼쪽은 요사채로 쓰이는 무량해회가 있는 네모꼴(ㅁ) 구조로 석탑이나 석등 하나 없이 간결하다.(김신묵 동년기자)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 협시로 한 삼불상을 모셨다. 천장에는 별도의 닫집이 없이 천장을 파고 들어간 보개를 설치하고 황룡과 백룡을 그렸는데 발톱이 5개로 (공민)왕이 다녀갔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김신묵 동년기자)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 협시로 한 삼불상을 모셨다. 천장에는 별도의 닫집이 없이 천장을 파고 들어간 보개를 설치하고 황룡과 백룡을 그렸는데 발톱이 5개로 (공민)왕이 다녀갔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김신묵 동년기자)

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를 걸었는데 이 부분을 보수할 때에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또 다른 후불탱화를 발견하였다. 대웅전 초창기 때 그린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 제161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사찰에서 별도 보관 중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둘러보았으면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을 다 본 것이다. 그만큼 봉정사의 규모는 크지 않고 당우(堂宇)들도 많지 않다. 그밖에는 작은 삼성각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 보았다고 하산을 해서는 안 된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에 영산암(靈山庵)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립문을 나서 흐르는 물을 건너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올랐다는데 지금은 계단이 잘 놓여 있다. 그저 고즈넉할 뿐 따로 볼만한 것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산사의 분위기가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이다.

극락전 앞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는 우화루(雨花樓)에 들어서면 정면에 응진전(나한전)과 삼성각이 있고 왼쪽에 송암당, 오른쪽에 관심당이 역시 네모꼴(ㅁ) 구조로 모여 있다. 가운데 마당에는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고 기암괴석을 심어 휘어진 향나무 고목과 함께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화루 1층에 들어서면 잘 정비된 반가(班家)의 정원처럼 나타나는 영산암 마당.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영화 ‘동승’,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등을 촬영한 곳이다.(김신묵 동년기자)
▲우화루 1층에 들어서면 잘 정비된 반가(班家)의 정원처럼 나타나는 영산암 마당.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영화 ‘동승’,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등을 촬영한 곳이다.(김신묵 동년기자)

▲마당에서 바라본 우화루 2층, 이곳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주지스님이 차담(茶啖)을 나누었지만 평상시엔 올라갈 수 없다.(김신묵 동년기자)
▲마당에서 바라본 우화루 2층, 이곳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주지스님이 차담(茶啖)을 나누었지만 평상시엔 올라갈 수 없다.(김신묵 동년기자)

봉정사를 일컬어 목조건축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국보로 지정된 것을 일컫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고졸하고도 검박한 건물들인지라 더욱 맘에 끌린다. 과연 영국 여왕에게 보여줄 만큼 가장 한국적인 건물임에 틀림이 없다.

다른 절집들보다 작은 규모에, 크고 화려하게 추진하는 중창불사 하나 없어 더욱 맘에 드는 진정한 산사(山寺) 봉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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