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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문학적인 영화 <남한산성>

기사입력 2017-10-14 12:24

▲영화 <남한산성>(박미령 동년기자)
▲영화 <남한산성>(박미령 동년기자)
몇 해 전 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개인적으로 소설가 김훈을 좋아한다. 사물의 본질을 캐 들어가는 생각의 집요함에 몸서리가 나지만 그의 언어는 절제되고 담백하여 울림이 크다. 때로 그의 언어가 고답적이고 사변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산문집 <자전거 여행>을 읽으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본질적으로 그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몸의 언어다. 그가 ‘길’에 천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감독(황동혁)의 영화라기보다 작가 김훈의 영화다. 이미 원작을 통해 빽빽이 작가가 세워 놓은 말의 숲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아니 감독은 애초에 그 삼엄한 언어의 포위망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가 전쟁을 배경으로 함에도 창과 칼보다 언어가 주 무기가 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매우 한국적인 ‘말의 전쟁’이 탄생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십 년 전 정묘년에 호란을 겪었으면서도 명나라를 향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정은 아무 대비도 없이 또 한 번의 호란을 맞이한다. 정보는 어두웠고, 군대는 허약했으며, 국가 시스템은 흐트러졌다. 지난번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은 공신들의 이기적 작태와 정보 누설로 막혀 부득이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한겨울 추위와 허기로 가득 찬 47일간의 기록이다.

영화는 소설처럼 장으로 나뉘어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된다. 영화 초반 김상헌이 성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말을 듣지 않은 뱃사공을 죽이고 나중 그의 손녀 나루가 성에 들어오면서 작은 스토리가 만들어지나 영화의 큰 줄기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 최명길(이병헌)의 말싸움으로 구성된다. 미래를 모르니 판단할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식량이 떨어져 간다는 냉혹한 현실뿐이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영의정 김류로 대표되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기득권층과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로 대표되는 민초의 대비다. 자신의 실패를 부하에게 뒤집어씌워 죽이는 김류의 비겁한 행위와 자신의 의무도 아니면서 김상헌의 부탁으로 적지로 뛰어드는 서날쇠의 행동은 비록 상투적이기는 하나 낡고 썩은 권력의 위선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의 백미는 김훈의 현란한 내공이 발휘된 김상헌과 최명길의 언어 대결이다. 둘의 논리는 한 치의 빈틈이 없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둘 모두 ‘길’을 말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각오하여 열리는 진정한 삶의 길도 있고, 비루하지만 삶으로써 얻어지는 내일의 길도 있다. 그리하여 김상헌은 자결로써 죽음을 얻었고, 최명길은 항복이라는 치욕을 통해 삶을 얻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며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보여주는 지리멸렬함과 해묵은 명분 싸움의 뿌리가 이리도 길고 깊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었다. 당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모든 정보를 손바닥 보듯 하는 지금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역사 위에 잠자는 기분이 들어 모골이 송연했다.

영화가 사실과 다른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실 그는 죽지 않고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82세까지 장수했다. 오늘에는 지탄의 대상인 그의 명분론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그의 후손들이 승승장구하는 바탕이 된다. 그로부터 시작된 안동김씨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며 망국의 씨앗이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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