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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안방

기사입력 2017-02-28 13:42

10년 전에 미국을 처음 여행했던 친구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며 미국 여행을 계획했다. 지난번에는 서부였으니 이번에는 동부를 가고 싶은데 가는 김에 마침 아들 집에 와 있는 필자를 만나러 뉴욕도 잠시 방문하면 좋겠단다. 그러라고 했다.

그러나 뉴욕 집은 필자 집이 아니고 아들 집이라서 의논을 해야 했다. 아들은 한국에서 오시는 어머니의 친구 분이니 흔쾌히 허락을 했고 필자는 친구가 묵는 동안 필자가 쓰는 방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가 오기 전부터 은근히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필자가 쓰는 방이 친구에게는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미리 잠자리의 환경을 자세하게 얘기해줬다.

친구가 조금 불편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필자 방이 지하에 있기 때문이었다. 뉴욕은 주거 공간이 비싸다는 걸 잘 알고 있어도 막상 지하에 있는 방에서 지내다 보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한국인이다. 아들 집은 지하라 해도 3분의 1은 지상으로 나와 있고 3분의 2가 지하다. 지상으로 나와 있는 곳에 유리창을 크게 내서 채광도 좋다. 성능 좋은 제습기까지 켜놓아 공기가 습하지도 않다. 아들 집이 있는 주택가는 특히 집값이 비싼 동네라 지하에 가족 일부가 주거하는 집들이 많다. 하지만 생활하기에 비위생적이거나 불편한 점은 전혀 없다.

친구에게 전화로 미리 이런 상황을 설명했을 때 그런가보다 이해하는 듯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어머니, 아니 시어머니가 사용하는 방이 지하라는 게 영 마뜩치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며느리의 친정에서도 필자의 지하방에 대해 여러 차례 거론했던 터라 아들 내외는 필자가 뉴욕 체류 중에는 손녀 방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늘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사는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1년에 석 달 머무르는 필자를 위해 손녀가 그때마다 물건들을 옮기고 다시 정리하는 번잡을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 집은 필자 집이 아니니 그러지 말라 했다. 아들 식구를 번잡하게 하고 싶지 않아 지하방을 사용하겠노라고 필자가 선택한 것이다.

지하방에는 필자가 오랫동안 잘 사용해온 묵은 친구 같은 침대도 있다. 서랍장도 하나 있어 꼭 필요한 기본 용품들을 간수해놓는다. 오갈 때 짐을 줄일 수 있어 간편하고 좋다. 친구가 오기 전 필자 침대 옆에 공기 주입 침대를 하나 들여놓고 새 시트를 깔았다. 친구가 쓸 침대였다. 3일 낮밤 동안 우리의 이야기는 줄줄이 사탕으로 엮어졌고 맨해튼을 비롯해 친구가 가보고 싶은 곳들도 더듬더듬 찾아가봤다. 참 오랜만에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은 우리의 감성을 건드려줬고 아름다운 추억들을 들추게 했다. 가슴만큼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무척 젊어진 날들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친구와 함께하면서 그토록 즐겁기만 했는데, 그렇게라도 친구에게 베풀 수 있었던 작은 마음들이 스스로 감사하고 고마웠는데. 친구는 떠나면서 “귀찮더라도, 네가 머무는 기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손녀 방을 사용하도록 하렴. 네 방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내 발걸음이 너무너무 무거웠다”는 말을 남겼다.

친구가 떠나면서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타 주에 살고 있는 미국 친구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 의견을 물었다. 필자의 지하방에 와본 적이 있는 친구였다. 미국 친구는 ‘어머니와 안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우리가 변하긴 변했나보다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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