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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이 고향이 되어버린 사람

기사입력 2017-02-08 18:51

유명인들의 작은 생활습관이 그 사람의 업적보다 더 잘 알려지기도 한다. 철학자 칸트의 산책 습관도 그렇다. 칸트의 산책 시간으로 주변 사람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칸트의 철학 이론이 거론되는 곳에서는 늘 함께 입에 올리는 이야기다.

필자가 앞뒤 가리지 않고 일만 했었던 시절이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피로해져야 강제적인 휴식을 하곤 했는데 그 휴식시간이 거의 정확했다. 일탈이라도 없으면 모든 정서가 석고화되겠다 싶어 어느 날 바람 따라 나들이를 한 곳이 맨해튼이다. 맨해튼 기차의 종착역인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내렸다. 기차역에서부터 무리를 지은 사람들을 보며 숨이 막혔다. 사람과 차들이 하도 많아 정물로 서 있는 높은 빌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순히 쉬고 싶어 한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정장 차림의 한국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시끌벅적한 것도 서울 도심의 직장인들이 가득한 식당 풍경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바글대고 시끄러운데 피로감은 싹 가시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랬지 한국에서도 이런 풍경 속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떠들곤 했지. 바로 그때 필자처럼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초로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합석은 우리들의 의사가 아니고 주인의 부탁에서 이루어졌다.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의 의미는 시간과 세속이 풍화시킨 성숙으로 다가왔다. 교육도 없이 수련이나 수양도 없이 지친 삶과 야박한 인심이 만들어낸 풍류객이었다.

“나는 1년에 한 번 이상 맨해튼에 온답니다. 여기 오면 꼭 이 식당에서 밥을 먹지요 칼국수와 김치를 먹고 싶어서가 아녜요. 사람들을 보고 싶어서예요. 한국 음식은 집에서 여기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1950년대 후반, 미군과 결혼해서 루이지애나로 왔다는 그녀는 시골이라 사람이 적고 거리도 깔끔하고 움직임이 느린 공간에서 살아왔단다. 변함없이, 수십 년간 보아온 자연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제는 지루하단다. 어느 날은 평화로움마저 슬프고 안정적인 날들도 시큰둥하고 특별한 문제가 없는 빤한 하루하루가 숨 막혀 맨해튼에 온단다. 맨해튼은 서울 같아서 가슴이 활짝 열려진단다. 지저분하고 홈리스가 있는 거리는 육이오사변 직후의 서울을 언 듯 생각나게 하고, 복작거림과 사람들의 지친 모습도 정감이 가고 메뚜기 뛰듯하는 경쟁은 동대문시장을 닮은 듯해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란다. 이제는 부모도 다 떠나버린 서울, 동생들이 어쩌다 미국에 오면 선물로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단다.

“그렇게 발전해버린 그 땅이 내 고향이겠어요?”

자신의 희생으로 교육도 받았겠다, 부까지 이룬 동생들이 자신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 눈치란다. 맨해튼이 자본주의의 꽃이라지만 그녀에게는 살려고 바둥거리는 가난한 사람들만 보인단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불나방처럼 모여든 사람들, 이루었다 싶으면 또다시 물거품이 될 그들의 꿈이 보인단다.

그녀가 고향을 찾듯 맨해튼을 찾아오는 마음은 아마도 치유되지 않은 한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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