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원만한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감동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새로운 것을 늘 보니 기뻐서 하루 800번을 웃지만 어른은 하루 8번 웃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아서 어른들에게 계속 질문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지간해서는 그러려니 하고 스스로 답을 얻고 말지 궁금해서 또는 호기심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알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여주 신륵사에 선배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선배님은 다리가 아프신지 “신륵사 절이라고 뭐 다르겠어. 절 다 그렇지 뭐 나 여기서 쉴 테니 자네들끼리 다녀오게 ” 하면서 벤치에 주저앉습니다. 불과 300m만 가 면 절 구경을 할 거리에서 멈추어 버립니다. “선배님 나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시지요.”했더니 손사래를 칩니다. 표정을 보니 확실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절 구경이 궁금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선배님이 착실한 기독교신자 여서 절은 싫어하나보다고 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선배님의 마음에는 사찰의 대웅전이나 부처님에 대한 호기심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없어지면 생각은 고루해지고 마음은 늙어가고 몸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려합니다. 물론 모든 사찰의 부처님은 대동소이합니다. 크게 보면 같지만 쪼개어 살피면 다 다릅니다. 누워있는 부처도 있고 받침대의 모양이나 앉은 위치 크기도 다 다릅니다. 나이 들면서 그러려니! 그럴 거야! 하고 질문을 닫아버리는 순간 우리의 뇌는 이미 늙어 감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녀들은 돌 굴러가는 것을 보고도 까르르 웃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면 바위가 굴러가도 겁만 먹을 뿐 즐거워 웃지 못합니다. 개그맨이 직업적으로 웃겨도 팔짱을 끼고 ‘웃기려면 웃겨봐라’ 노려보며 시큰 둥 합니다.
필자는 스스로 호기심을 만들어 냅니다. 카톡으로 자식들한테 문자나 그림을 날리면서 이놈 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합니다. 예상한 반응을 보이면 재미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도서관에 유지송님이 쓴 ‘은퇴달력’이라는 책이 철학 분류기호인 100번을 달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왜 틀린 분류표 명찰을 달았는지 궁금합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전문가인 사서 도서관 직원에게 300번 대의 사회분류표를 달아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금방 알아듣고 잘못을 시인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잘못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 이야기도 궁금하고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오늘 커피를 나눈 분은 젊어서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시골에 한옥 황토방을 만들어 귀향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건설현장 이이야기도 듣고 황토방의 좋은 점을 터득합니다. 책에 없는 호기심을 채워주는 좋은 이야기는 경험한 사람에게 직접 듣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늙어가는 잣대는 바로 호기심이 얼마나 있느냐 입니다.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습니다. 공자님 말씀에도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현대판 평생학습입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호기심 천국입니다. 우리에게 호기심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한 청춘입니다.